장군의 후예 3 - 지리산 뱀사골
박찬두 지음 / 작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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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후예

박찬두 지음
작가 2013.02.28
펑점

장군의 후예란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는 어쩌면 현대사의 비극의 정점에서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마치신 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약 7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황희정승과 400여년 전의 1592 -1597 년도의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사수를 위해 호국의 불길을 키워 나라를 지켰던 황진 장군 ,, 그리고 이후 일제 36년 암흑의 역사기에서 구국을 노래한 매천 황현의 후예 .. .. 어쩌면 정의의 불사조처럼 그시대의 아품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던 우리 20세기의 비극이 아니 었을까 한다..

지은이 박찬두는 2000년 초반에 황의지 옹을 수차례 인터뷰 하고 2005년 그의 사후에 역사의 뒤안길에 있던 우리나라의 아픈 상처를 드러 내었다....

몇 해 전에도 사회주의 이념과 신념으로 50여년 세월이상을 청송 교도소에 복역 하다가 이북으로 북송이 된 사례도 종종 신문 지상을 통해서 본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평생 그 신념의 올가미를 벗어 나지 못하게 하는가 혹은 과연 그는 당연히 그러한 자신의 정의가 옳다고 항상 생각해 왓는지 모른다, 그것도 조국의 이름으로 ,,,아무래 변색되어도 가져가야만 하는 자신만의 정신 세계 일것이다..

이념 , 신념 , 그리고 이데올로기 ... 이러한 정신바탕위에 놓인 민족이라는 공동체 .. 절체절명의 구국의 깃발아래 일제 시기에 독립 투쟁을 위한 방법이 여러 갈래 였다.. 지식인들을 통한 문필 운동 , 농민, 상인들을 중심으로한 독립 자금 보내기 운동 , 일제 경찰앞잡이의 눈에뛰지 않으면서도 요소요소 무력 시위를 했던 활빈당 같은 조직들, 나라밖에서의 상해 임시 정부 ,,

황의지 -라는 파르티잔 장군이란 호칭은 이책을 통해서 듣는다,, 역사와 정규 교과서의 소개는 단순한 공비나 빨갱이에 지나지 않을 그들이다.

우선 파르티잔 이란 요어를 위키디파아에서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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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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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좀더 자세한 파르티잔의 발생의 자생적 정세적 배경 이다. ..

정세적 배경

여수·순천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군정기인 1946년에 발생한 대구 10·1 사건( 대구 폭동 )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서 남조선로동당(줄여서 남로당)이 탄압,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 인사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이다.[1] 이들 가운데 일부가 2·7 사건제주 4·3 사건 이후 전라남도 곡성군구례군 일대에서 야산대로 불리던 무장 유격대로 전환했고, 야산대 일부는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되어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이미 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야산대가 탄생하여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은 한국 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2] 조선인민유격대는 제주 4·3 사건여수·순천 사건을 한국 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 과정은 일종의'작은 전쟁'이 되어 한국 전쟁의 전초전을 형성했다.

한국 전쟁 전 형성된 유격지구

[편집] 유격 지구의 형성

야산대가 속속 입산하면서 1948년부터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인 유격 지구가 형성되었다. 주목할 만한 유격 지구는 다음 5군데였다.[3]

  1. 호남 유격 지구 : 전남의 나주군, 영광군, 함평군, 장흥군 평야 지역.
  2. 지리산 유격 지구 :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백운산과 북쪽의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 지대.
  3. 태백산 유격 지구: 태백산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안동군청송군에 이르는 강원 남부와 경북 북부의 산악 지대.
  4. 영남 유격 지구 : 경북 경주군, 영천군, 영일군, 청도군대구 주변과 경남 양산군, 울산군, 동래군 주변 지대.
  5. 제주도 유격 지구 :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형성된 제주도 한라산 일대 지역.

이 가운데 자연 환경이 유리한 지리산 유격 지구가 나중에 조선인민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다.

[편집] 조선인민유격대의 창설

남로당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한 1949년 6월에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줄여서 조국전선)이 발족했다. 조국전선이 출범하면서 채택한 성명서에는 무장 유격 투쟁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담겨 있다.

만일 반동이 고집하고 평화적 통일사업을 방해하는 때에는 그는 조선인민의 처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선인민은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와 독립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애를 주는 모든 놈들을 자기의 길에서 능히 소탕할 것이다.

조국전선 결성 대회에서는 지리산의 유격대에서 보내온 전갈도 소개되었다. 조국전선의 결성은 '남조선 애국인민'들의 국토 완정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계기로 평가되어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투쟁에 나선 대한민국 국민, 즉 유격대와의 연계가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4]

조선로동당 창당을 분기점으로 유격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발생 초기의 기층적이며 자발적인 성격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업 지원으로 외부적 요인에 압도되면서, 조직적 체계가 정비되었고 상층 지도부의 선도에 따르는 방향으로 변모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일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기구로 조선인민유격대를 1949년 7월에 창설했다. 지휘 계통은 남조선로동당박헌영리승엽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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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비운의 패장은 14대 조상인 황진 장군 이야기이다.. 진주성을 사수 하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총공세에 밀려 마지막까지 성을 사수하다가 숨진 패장이다, 어쩌면 현대전의 이야기에선 무모하리 만치 성을 끝까지 사수한것은 무리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특히 자신의 관할 지역이 충청권 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투지와 장군의 기개는 그당시 선조가 피란을 가면서도 사후 공훈을 거둬 준것으로도 족히 큰 공로는 알수 있다..

제2권 ; 본격적인 황의지 장군의 청년 시절 이야기이다.. 그 시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울분을 느꼈을 법한 압제적인 일제의 행위에서 어떻게해서라도 가족과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만주 강제 징병을 떠나 탈출의 기회를 보다 해방을 맞는다 동시에 다시 소련으로 추운 시배리아로 전쟁 포로로서의 3여년 강제 노역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가 느겼던 스탈린 소련 체제의 정확성과

공동 분배및 역할 분담이라는 사회주의적 요소에 대해 어느정도나마 체험으로 배우지 않았을까 추론을 해본다. 그 이후 전쟁 포로를 이북으로 넘겨 주는 과정에서 이산가족이 있기에 다시 남한으로 오고자 하였으나 미/ 소 신탁 통치의 분단 으로 정치적인 교환이 이뤄지지 않아 산팔적인 민간 이남으로 인해 남한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게된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황 장군은

일제 시대 경찰과 다른것이 없고 세상이 바뀐 것없이 일제에서 미국 제국주의 로의 명칭 이동에 분개 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창조적인 미래를 , 가족들의 안락한 삶을 살고자 했던 그를 포함한 어느정도 지식기반을 가졌던 , 일제 만행에 주리를 틀렸던 백성들은 또다시 반란을 꿈군다 , 그리고 그들이 거치해야 할 곳은 은신처가 되어줄 거대한 산맥 - 지리산 인것이다..

김일성 - 지금은 김정은의 할아버지 이지만 한때 잘 나가던 만주의 열사 이기도 하다 , 역사 교과서에는 그의 항일 투쟁이 삭제외어 있지만 그도 또한 전쟁 전까지는 무장 항일 투사 인것은 인정 해야만 한다. 다만 ,사회주의 연결 고리에서 소련의 배후를 얻고 중공의 지원을 받은 그가 남한의 자생적인 파르티잔 무리들이 반 궐기 하는 시점인 1946 년 이후 6.25 발발 이전 1949 년 전 후로 해서 , " 해방 전쟁" 이라고 이름 붙인 그네들의 사회주의혁명은 -현재는 퇴색한 세습 봉건 국간? 인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린 ..실패한 혁명이 아닌가 한ㄷ..

거슬러 올라간 그때 당시의 근대적 지식인들은 어쩌면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 , 혹은 민중이나 국민의 지원을 받는 중공의 모택동식 사회주의 에 염원을 갖고 이러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을 , 시회주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보아진다...

결국 , 정권은 정치는 놓지 못하는 권력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정치 논리에는 수순이 없다. 미군정이 행해지던 그 시간들속에는 또한 힘을 득세하려는 무리들과 세력은 당연히 있는법 ,, 국민들앞을 총부리로 무력 진압 하려 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결국 하야 하고 ,, 이후 군부의 득세로 이어진 현대 수난사 이다.

제 3부 지리산 뱀사골 -편 이야기는 마지막 파르티잔의 세력들이 사그러 들면서 절체 절명의 순간 죽음의 길을 택 하였지만 결국 살아 남게 되면서 어느 경찰국장의 진실한 설득으로 180 도 방향 전환을 하게 이념 전쟁을 종식 시키고자 남은 파르티잔 전향에 힘을 쓰게 된다..

한많은 세상을 살다간 그가 꿈꾼 세상은 어떤 것이 었을까 ,, 국군과 대치하고 , 경찰 병력들과 전투를 벌였을때는 무슨 생각들을 하였을까 . 반대편 입장에 서서 총부리를 겨눈 그들도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반야 봉을 오르고 , 전투를 벌이고 그리고 죽어 갔을까 ... 그 사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 군경에서 혹은 빨치산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는 죄목만으로 온마을 사람들이

학살 당한 그 사실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얼마전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사가 뉴스에 나온적이 있다.. 끝나지 않는 상처이다. 누가 누구에게 죄가 있다고 할까 ..

혼란기 , 거의 무정부 사회에서 벌어 지는 일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관은 누구인가..

지리산 뱀사골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등반 코스로 사랑을 받으며 오르 내리는 등반객들이 많지만 그날의 상처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시퍼런 우리의 아픔을 간직한 명산 이기도 하다 .. 덧붙여서 제주의 4.3 사건 도한 제주 모든 올레길엔 수많은 혼백들이

자리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떠날 줄 모르는 그들이 ..

위령제를 올리고픈 밤이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한다... 시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한명 한명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또한 우리이고 이웃 사촌이 아니던가...

2013 / 4/ 13 -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만주 하얼빈 역사 , 이등박문 (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넘어 드린 우리의 장한 할아버지 안중군 의사의 동상이 있는 남산엘 올라 이봄 활짝핀 벛꼿 사이로 축원을 드리고픈 날이다.. 책력거 쓰다..

Note : 장미가 영국의 국화라서 프랑스사람들이 장미를 사랑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쿠라가 일본 국화이긴 하지만 꽃은 경계가 없다고 한다... 무궁화도 좋지만 활짝핀 벚꼿을 보면서 역사를 간직 하는 것도 사쿠라 침략길을 돌에 새기는 정신도 중요하리라고 본다.... 진해 군항제 벚꽃 소식을 들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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