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에밀 졸라와 폴 세잔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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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두애  [ 1898년 1월 13일, 드레퓌스파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 속에서 소설가 에밀 졸라는 클레망소가 펴내는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Felix Faure, 1841-1899)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발표했다. 그는 3일 전에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조작된 증거와 졸속 재판을 통해 무죄 석방된 것에 대해 격노하며 이 글을 썼다. 그 글이 발표되면 작가로서의 자기 경력에 얼마나 손실이 될지, 특히 그가 오랫동안 열망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될 수 없음도 잘 알았다. (…) 졸라는 사건 전체를 스무 쪽으로 요약하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썼다. 그는 정부와 군부를 비판하고 재판과 관련하여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 주었다고 고발했다. (…) 이 글의 원제목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로로르》의 편집장인 클레망소의 권유에 따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1800년대 대표적인 현대 문학의 거장 에밀 졸라와 , 초기 인상파의 대가 폴 세잔의 만남 , 그둘은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 나이차 또한 1살 이어서 유년시절 이래로 거의 친구로서 지내 왔다. 다만 졸라의 경우는 거의 파리 대조시에서 생활을 한 파리지앵이고 세잔은 액상 프로장스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그림 공부르 하며 거칠게 자연을 살아왔던 촌놈과도 같다. 


이글 주제는 총 9장으로 이뤄져 있지만 크게 2부로 나눌수 있는데 드뢰피스 사건 이전과 이후로 당대 지식인들의 이합 집산과 중도와 보수 그리고 진보적인 인사들의 지지애 따른 편향이 생겨나기 시작 했는데 , 죽마고우 세잔과 졸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드뢰피스 사건은 1886년, 졸라의 '작품'이 발표되고 8년이 지난 1894년 9월에 시작 되었고 ,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것은 1896년도 이고 졸라가 드뢰피스를 위해 [ 나는 고발한다] 라는 제목의 글을 쓴것은 1898년도 이다.  그당시 졸라는 58세 , 세잔은 59세 였다. 이후 2년뒤 , 친드레퓌스와 반 드레퓌스로 갈라지게 되었고 반 드레퓌스의 선봉은 카톨릭이었는데 세잔은 52세가 된 1891년에 카톨릭으로 돌아 섰다.. 사건이 터진후 각자 지지 하던 이상에 의해 ,  그둘의 관계와 우정은 깨어 진것으로 보여 졌다.  


졸라에게는 [작품] 이 발표된 1886년 이후 미술에 덜 관심을 두게 되었고, 유년 시절 엑스프로방스를 방문 하면서 앃아왔던 세잔과의 우정과 또는 세잔이 졸라를 모델로한 작품 그림에서도 그의 상당한 비중을 두어왔음에도 졸라는 1896년경에는 완전히 미술세계에 관심을 끊게 되었다. 


반면 세잔은 그무렵부터 , 좀더 독창적인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 하기 시작 하였고 그해 4월에 세잔은 결혼 하였고 10월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이어 1889년에는 만국 박람회 기간에 열린 ' 프랑스 미술 100년전' 에 < 목맨 사람의 집> 이 전시되어 최초의 영광이 찾아 왔고, 서서히 유명 해 지기 시작 하였다. 


반면 , 졸라는 점점더 정치적 논조의 글 쓰기가 이어졌고 , 그 최고정점은 1898년 [ 나는 고발한다] 이다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그의 글 의 요약이다. 


[나는 고발한다(프랑스어: J'accuse)는 신문 로로르(L’Aurore)지 1898년 1월 13일자에 실린 글로 에밀 졸라가 대통령(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에밀 졸라는 3일 전에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조작된 증거와 졸속 재판을 통해 무죄석방[1] 된 것에 대해 격노하며 이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정부와 군부를 비판하고 재판과 관련하여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대중에게 고발하며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이 글이 실린 '로로르' 신문은 평소보다 10배 이상인 30만 부가 팔려 나갔으며[2] 사회적 파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재심요구파와 재심반대파로 분열되었고, 준내전 사태에 이를 정도로 양진영은 본격적으로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였다. 시위, 폭동, 테러, 폭력사태, 유혈충돌이 빈번하였고 정치 쟁점화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존립마저 흔들렸다.

이 글의 원제목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로로르>의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의 권유에 따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3] 이 서한에서 졸라는 대통령 펠릭스 포르를 거론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부당한 구속수감을 비난하였다. 졸라는 여러 사법적 오류와 증거의 부족을 지적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세잔이 오랜기간 머물렀고 , 작품활동을 해왔던 액상 프로방스라는 지역은 어디 일까 , 남프랑스 아래 이다.

https://www.france.fr/ko/provence/article/31210


다시 졸라의  실험소설의 탄생인 [ 테레즈 라캥] 으로 돌아가 보자 , 1867년 그의 나이 27세에 장편 소설 [ 레레즈 라캥] 과 1868년도 [ 마들렌 페라]를 출간 하였는데 , 그의 초기 작품중 가장 중요한 것이고  프랑스 자연 주의 문학의 완결인 < 루공-마카르총서>의 예고편 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박찬욱 감독의 < 박쥐>영화에도 영감과 힌트를 준 작품이기도 하다.  테레즈 라캥은 파리의 퐁네프바사주가 배경이고 소설 역사상 하층민들이 주인공이고 온갖 불륜과 살인 , 범죄를 저질르는 당시로는 쇼킹한 주제였다. - 졸라 작가의 말은 다음과 같다. -- 

[ 나는 사라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 하기를 원했다. 이책의 전제는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 당하고 육체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 가는 ,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 받는 인물들을 선택 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 그이상은 어무것도 없다. 나는 일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식 좇아가 보려고 노력 했다. 살인은 그들이 저지른 간통의 결과이며, 그들은 마치 늑대가 양을 학살하듯 살인 한다. -내가 그들의 회한을 총구해야 했던 부분은 , 단순한 생체 조직 내의 무질 서 , 파괴를 향한 신경 체계의 반란 이었다.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 한다. ] 


졸라는 초기 작품의 성공이후로도 계속 출간과 인세의 수입으로 어느 정도 부유 하게 되면서 센강의 저택을 사들에 아뜰리에로 꾸며고 세잔과 같은 미술가를 초대 하여 한동한 같이 묵고 토론 하거나 지내기도 하엿다. 

그 시절 세잔 또한 강변의 풍경을  그린 작품또한 남겨져 있다. 


에밀 졸라와의 관게에 있어서 그들의 30여년간의 우정을 간직 하면서도 냉담 하게 돌아선 것은 오히려 더 정치적인 이유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라 , 세간의 이목은 졸라의 작품에서 세잔을 모델로한 화가를 비하하는 내용이었고 이를 책자로 전달 하여준 졸라에게 세잔이 마지막 편지를 보낸 이후 관계가 끊어 졌다고 하지만 이또한 추정의 일부일 뿐이다.  -아래 


[[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죽마고우였던 에밀 졸라와의 관계는 그가 대표작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 네 번째 소설 〈작품〉(L'oeuvre) 속에 등장시킨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재능 없는 화가 클로드의 모델이 세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파국을 맞았다.[1]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상황이 세잔 본인과 비슷했고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졸라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과 유사했기에 세잔은 큰 충격을 받았다.[1] 졸라가 보내준 소설을 읽은 세잔은 1886년 4월 그에게 "이렇게 훌륭히 추억을 담아주어 감사하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30여년의 우정에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는 그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잔은 졸라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1]두 사람의 우정과 갈등은 훗날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 , Cezanne and I, 2015)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출처 -위키 백과 


그둘은 죽음으로 갈라서는 시기 또한 비숫 하였다. 


새잔 

1839.1.19일 프랑스 액상프로방스 출생 

1861 법공부를 중단 , 파리오 떠남, 친구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 아카데미 쉬스에서 미술을 공부 , 우울증으로 다시 고향 액상프로방스로 돌아옴 

1873 < 목맨 사람의 집 >

1882 -처음으로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 

1904 <생트빅투아르 산 > 

1906.10.22 세잔 사망 


졸라 

1840.4.2 파리에서 출생 

1867  < 테레즈 라캥 > 출판 

1871 < 두록가의 운명 > 출판 

1885 < 제르미날 > 완성 

1887 농민 소설 < 대지 > 완성 

1893 < 파스칼 박사> 출판으로 < 루고 -마카르총서 > 20권 완성 

1902.9.28 졸라 사망 

1908년도 팡테옹 국립묘지 안치 .


어찌도면 도시 소년과 시골 소년의 운명적인 교류는 종종 길이 엇갈리기는 하였으나 에밀의 초기 미술작품에 대한 화가들의 비평논를 기사화 하면서 점차 그의 존제가 커져 가는 와중에 인상파의 창시자인 세잔은 중년에 머물 도록 빛을 발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나 살롱전 데뷔후 그의 작품 활동력도 더욱 배가 되었고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 또한 커진 것 또한 사실이다. 같은 시대 다른 배경으로 유대주의와 반 유대주의의 산물인 드뢰피스 사건의 쟁점을 이끌어온 에밀졸라, 재심의 결과를 지켜 보지는 못하였지만 역사는 무죄를 선고 하엿고 

당시 프랑스 지식전 거의 전부가 이 사건을 부끄러워 하였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문화 강국이 되어 가는 한국에서 약 200여년전 일어난 프랑스 반 유대주의에 편파적인 판정을 냐린 기존 사회층에 대한 [ 나는 고발 한다] 라는 간단 명료한 명제 부터 출발한 졸러의 사실 판단에 근거한 주의 주장에 결국 귀 기울여 주었고 , 권려과 기득권층은 그 틀을 깨워 부술 수 밖에 없엇다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면분 과도 같은 정의로움이  이 땅 대한 민국 과거사에도 적용 될 수 있느냐라는 반어법에 다름 아니다. 


우리들 , 혹은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각자가 , 역사의 진실 앞에서 과연 , 사실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여 말 할수 있었던 사람은 관련 몇이나 있었을까 , 그리하여 재심으로 그 지난한 새월의 억울함을 풀어줄 판결이 나온 사례가 과연 몇 건 이었을까 하는 의문 아닌 의문문으로  시대의 지식인 상을 제시 하고 있다면  과장 일까 .  오늘의 단상 ,  Written by  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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