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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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두에 

『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남자』는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발생한 ‘홍경래의 난’과 ‘프랑스 대혁명’이란 두 사건이 미묘하게 닮아있음을 발견하고 이 두 역사적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려고 한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그 열쇠는 ‘세인트 헬레나 섬!’


주인공인 조선 청년 ‘안지경’은 홍경래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다가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천신만고 끝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이른다. 세인트 헬레나 섬은 대서양 한복판의 작은 섬으로 나폴레옹의 유배지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섬에서 ‘안지경’은 운명처럼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는데……]] 


작가적 상상력을 빌려 조선에서 발생 하였던 홍경래의 난과  이국 프랑스 대혁면의 연대기를 맞추어 팩션인듯 흘러 내린 소설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간략한 역사적인 연대기를 살펴 보자 


" 홍경래의 난(洪景來ㅡ亂)은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이다.'"  Source ;나무 위키 


" 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문재(文才)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개천의 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령강(대령강)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그런데 거병이 막히지 않고 잘 이어갔다. "   Source ; 위키 백과  


아래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 이다.

"  프랑스 혁명(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은 매년 7월 14일로 국경일이자 공휴일이다.[1]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한 1789년 7월 14일을 기리기 위해서 이듬해 1790년 7월 14일에 진행된 혁명기념 축제가 그 기원이다."    source ; 위키백과  


" 프랑스 사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구체제) 하에서 18세기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심각한 경제불황은 인구의 절대다수(98%)를 차지하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으며 마침내 흉작이 발생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민중혁명의 단계로 변화된 이 혁명은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켰다. 혁명 소식을 접한 피지배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 쟁취 의식에 고취되자 여러 민족을 거느린 유럽의 군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2] " Source ; 위키백과 


나폴레옹의 세인트 헬레나의 유배시기 


"  세인트헬레나(영어: Saint Helena)는 앙골라 서쪽 해안으로부터 2,800km 떨어진 남대서양 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면적은 425㎢로, 부산광역시 기장군(218.04㎢)의 2배 정도가 되며, 경기도 남양주시(458.535㎢), 평택시(458.2㎢) 보다는 약간 작다. 영국의 해외 영토인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 속하며, 수도는 제임스타운이다. 나폴레옹이 이 섬으로 유배온 것으로 유명하다." Source ; 위키백과 


나폴레옹과 세인트 헬레나[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을 탈출한 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자, 빈 회의는 그의 신변 처리를 영국에 일임하였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망명 수용을 거부하고 보호를 명목으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가두기로 하였다. 나폴레옹은 1815년 10월 세인트 헬레나에 도착, 1821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섬 중앙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살았다. 영국은 허드슨 로 총독에게 나폴레옹의 감시를 지시했다. 이를 “유배”라고 표현하나, 이는 재판이나 조약에 근거하지 않은 불법 구금이었으며, 허드슨 로는 나폴레옹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나폴레옹이 병으로 몸져눕자 나폴레옹의 주치의를 영국 본토에 강제로 내보냈다. "   Source ;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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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는 1812년도에 막을 내렸으나 , 그 주인공 중 하나인 최측근 안자경은 목숨을 부지 하여 이영선을 타고, 남중국 , 대서양 항해를 하였으며,  어디에도 기착 할 수 없는 신분 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 찰스턴 경의 도움으로 이국의 향해를 계혹 하던중 ,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또한 조선 대 혁명과 무관 하지 않다라는 전제 하에 , 세인트 헬레나 섬에 기착 우연 찮게도 나폴레옹을 마주한 안자경과 황제를 급진 자코뱅당파로부터 구해준 댓가로 받은 금괴를 바탕으로 다시 중국의 대상단의 거상 행수로서 조선을 다시 찾은 그의 감정은 요동 친다. 


그 엤날 , 정주성의 함락올 목전에 두고 , 전우들을 배반 하여 , 이제는 어였던 포도청의 종사관이 된자와 벼슬아치 그리고 , 행수 상단의 상군 노릇을 하는 그들을 좌시 할 수 없는 안자경과 그의 연인 홍차련을 다시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까지도 


한편의 대하 드라마 같기도 하고, 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유럽과 중극의 문물을 오고 가며 다시 조선이라는 현실의 바탕에서 갈등 하여야 하는 주인공은 역성 혁명고  농민 대혁명의 볼쏘시게가 되기를 다짐 하며 , 한 많은 가슴을 움켜 쥐고 , 이양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마포 나룻터를 벗어 난다.  


당시 평안도 서북 지방의 만란을 소재로한 홍경래의 난이기는 하지만 한편 어느 정도 성공적인 거병 동기를 내새웠으나 , 이해 집산들의 사리 사략과 당리 당략에 따른 결집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왔고 , 시간과 물자의 한 계점,  일사 불란한 거병의 통제의 시기를 놓쳐 버린 점은 역사적인 사료로서도 한번 검증 해볼 만한 일이다.  


다시 올수 없는 거사의 날이 가까워질 무렵 , 그들 혁명자들은 그날 그밤  어떤 생각들을 하였던 것일 까 , 역사는 어쩌면 숙명과 운명의 날줄과 씨줄 처럼 한치 오차도 없이 얽여져 있어 ,  혁명의 태동을 예고 하기도 하도 , 실패 또한 예견 되는 것이기도 하는 것인가.    Written by 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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