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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 - 스케치북이 이끈 길 위의 감정 연대기
손혜진 지음 / 아트앤플레이 / 2025년 12월
평점 :

이 포스팅은 아트앤플레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20년 넘게 IT 현장에서 디지털 기기와 기술 트렌드를 소개해 왔지만, 개인적으로는 손으로 직접 만들고 그리는 아날로그적 행위를 즐긴다. 어렸을 때 즐기던 종이접기를 요즘도 취미 삼아 이어가며, 이를 쇼츠(Shorts) 영상으로 제작해 공유하기도 한다. 지난해부터 ‘어반드로잉(Urban Drawing)’에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세종문화회관의 관련 강좌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들떴으나, 바쁜 일정 탓에 미뤄왔던 참이다.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는 어반드로잉의 본질을 제목 그대로 투영한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내년에는 미뤄두었던 어반드로잉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저자는 오랜 인연과의 거리감이나 외로움으로 삶이 흔들릴 때, 어반드로잉을 새로운 탈출구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한 ‘그림 기법서’라기보다, 스케치북을 매개로 삶의 무너진 지형도를 복원해 나가는 한 인간의 ‘감정 연대기’에 가깝다.
저자 손혜진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큐레이터와 방송작가를 거친 전문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대인관계의 피로와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돌보는 고단한 현실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세상이 흐릿하게 보일 만큼 절망적인 순간, 그는 광화문 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어반드로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친구가 꼭 사람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라는 저자의 자문은 관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평소 어반드로잉에 관심이 많아 아이패드를 구입하고 디지털 드로잉을 시도해 볼 요량이었다. 이 책이 특히 반가웠던 이유는 드로잉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춰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드로잉을 재정의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풍경을 예쁘게 복제하는 작업이 아니라, ‘몰입을 통한 현존’의 과정이자 무뎌진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수행이다.
스케치북을 들고 걷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대목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빛의 방향, 공기의 흐름, 나무의 호흡,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도까지.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고 풍경 속에 머물 때 세상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기억은 언어보다 이미지로 더 많이 남기에 그림은 이를 담아내기에 좋은 도구”라는 저자의 말은 어반드로잉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책의 배경은 정릉의 낡은 집, 온수동의 논밭, 수원 행궁동 골목 등 익숙한 일상이다. 미술 전공자다운 유려한 수채화 드로잉이 시선을 붙잡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그 속에 담긴 서사다. 저자는 이를 ‘삶의 지형도를 다시 읽어내는 일’이라 표현한다. 사진이나 영상 같은 디지털 기록에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붙잡는 과정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스케치북을 들고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직접 걸으며 나아갈 길을 찾았다. 산책드로잉은 풍경을 그리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삶을 다시 그리는 과정이었으며, 기록을 통해 자신에게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 또한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기술적인 ‘잘 그리는 법’을 전수하는 대신, ‘왜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건네는 책이다. 인생의 반환점에서 삶이 황무지처럼 느껴지는 이들이라면 더욱 공감할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스케치북 한 권과 펜 한 자루로 시작하는 일상의 기록은, 누구나 저자처럼 자신만의 ‘빛나는 언덕’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어반드로잉 입문자에게는 테크닉보다 중요한 ‘시선의 온도’를, 관계에 지친 이들에게는 ‘사물과 풍경’이 주는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인생 이모작과 후반생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