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1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희랍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어떤 이름이든 꽤 익숙하게 들어 온 책 이름. 니코스 카잔차키스.
중고등학교때, 책 깨나 읽는다는 아이들의 입에선 도스또옙스키가 나왔고, 까뮈, 지이드, 니체, 괴테, 사르트르가 줄줄 읊어지곤 했다. 실존에 대한 의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심. 그런것들이 파고들기에 사춘기란 시기는 너무나 좋은 서식지였다.
물론 책을 읽고 격론을 벌인다고해서 즉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고, 그럴리도 없었다. 실존의 문제는 삶의 과정 속에서 규명되어지는 개별적 과제일지도 모른다는게 요즘의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인식의 구조, 그 속에서 습득되고 발현되는 수없는 유동적과정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집약. 어쩌면 실존이란 건 끝없이 의심하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희랍인 조르바라는 책을 읽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조악한 번역. 지금처럼 눈에 감기고 입에 붙는 문장이 아닌 덜거덕거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읽었다.
조르바의 성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그런 번역이었기에 가능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기복이 심한, 의미없이 충실한 번역.
방탄소년단의 신곡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서로 데미안을 읽는다고 난리도 아니다. 싱클레어, 베아트리체..
통치권력의 부패함을 마주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존을 이야기 하는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그나마 웃음을 빼물며 읽을 수 있는 책. 다행이다.

책 속에서 해답을 찾고 책 속에서 위안을 찾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조르바를 만나게 되고 그와 동행하게 된다. 텍스트 속의 인물들이 익숙한 '나'에게 조르바는 생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즉흥적이고 말초적이며 천박하기까지 한 그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위와 말 곳곳에서 드러나는 삶의 진정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반박할 수 없다. 어쩐지 부코스키가 생각나고 돈키호테가 떠오르기도 했다. 엉뚱하다 싶게 정의감에 불타던 돈키호테와 위악적인 허세가 보태진 부코스키의 글들이 새록새록 눈에 밟힌다. 돈키호테-조르바-부코스키의 어떤 계보를 적어봐도 좋겠다.
Vio kai poitia tou Alexi Zormpa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 우리가 알고 있는 Zorba the Greek -그리스인 조르바 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이라는 원제를 보면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 조르바의 이야기.
도대체 안 해 본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는 조르바는 , 어떤 이야기든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조르바는, 자신의 감정과 충동에 충실한 조르바는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토록 알고싶은 인간의 '원형'이다. 느껴지는 모든것에 솔직한, 진심으로 제 삶을 존중하고 즐기는 태도. '가치'라는 것이 인간과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한다. 결국 '자유'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 것인가. 되묻는다. 가식과 욕심의 굴레, 그 굴레를 벗어내기 위한 몸부림은 아닐까. 하지만 조르바의 자유는 말 그대로 자유다.
어떤 속박과 굴레를 지칭하지 않는 순수한 자유. 그것을 원하는 사람. 또한 그것을 누리는 사람. 그것은, 제 삶의 주인이 된 자만이 눈치챌 수 있는 인간성 가장 밑에 숨겨둔 비밀이 아닐까.

처음부터 밑줄을 긋지 않으려 했다. 귀퉁이도 접지 않으려 했다. 어릴 적 내게 '자유'라는 말을 화인처럼 박아 넣은 책의 잔상은 아직까지도 기어코 남아 눈보다 먼저 다음페이지를 뛰곤 했다. 여전히 가슴이 뛰는 조르바. 산투리를 연주하고 같이 춤을 추자고 손짓하는 조르바. 그 사이에 어떤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수 있을까? 어떤 의심이 파고들 수 있을까. 다만 충실하게 뛰는 그의 심장, 그 심장의 건강한 박동에 고개를 끄덕이고 두 팔을 높이 들고 함께 겅중거리며 춤을 출 수 밖에..

수많은 말들 사이에서 찾은 자유. 눈 속에 박힌 얼음 알갱이처럼 모든 글에서 자유를 찾아내고 자유에의 갈망을 찾아내고 자유롭고자 하는 본성을 찾아낸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자유가 아닌 기꺼이 온몸으로 체득해 내는 자유. 삶을 마주볼 용기가 날 때까지 수없이 부딪고 깨지며 얻어내는 자유. 그렇게 틀어쥐고 기어이 품게 되는 자유. 한 사람의 자유가 사람과 사람에게 전이되고 증폭되는 그 한가운데 조르바라는 촉매가. 사람이. 순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어쩌면 조르바를 통해 위로받고 싶었을거다. 이 혹독한 시기를 살아내기 위해, 사람에 대한 실망과 사람에 대한 불신과 그와 더불어 사람에 대한 감동과 사람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키워나가는 분열적인 일상에서 과연 인간의 존재의미는, 본성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득 광장 한가운데서 조르바처럼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통의 축제 그 한가운데서 '자유'로운 본래적 인간으로 말이다.

[ 그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마치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쩌시려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자기 무게를 극복하고 날고 싶은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민첩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빠르고 맹렬한 스템이 남긴 발자국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p373-374)]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다. 인간으로서의 삶. 가볍게 날아오를 자유. 이 땅에 살았던 흔적을 물고기의 비늘처럼 하얗게 뿌리고 조용히 바스라질 자유를 꿈꾼다.
바람이 불고나면 깔끔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어떤 역사를 잠깐 남기는 것으로, 바스라져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걸죽한 욕 한마디쯤 내뱉을 수 있는 아름다운 천박함을 꿈꾼다. "잘 살았다. 그깟 자유따위~!"

본래적 인간 조르바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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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0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씨 번역이 넘사벽이라서 《조르바》 다른 번역본을 내는 역자와 출판사들은 심리적 부담감을 느꼈을 겁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서재 이웃님들 대부분은 이윤기씨 번역본을 많이 보거든요. ^^;;

나타샤 2016-11-10 15:21   좋아요 0 | URL
성근 번역조차 읽을만한 책들도 잘 없죠^^ 이윤기씨 번역본 읽고 다른 번역본 읽는 맛도 나쁘지 않아요. 갓 구운 우유식빵 먹다 하루 지난 호밀빵을 씹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