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다시 말해볼까

삶에 관하여, 삶의 풍경에 관하여,

주리를 틀 시대에 관하여,

아니 아니,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詩여 모가지여,

가늘고도 모진 詩의 모가지여)

그러나 비틀어 잠가도, 새어나온다

썩은 물처럼,

송장이 썩어나오는 물처럼.


내 삶의 썩은 즙,

한잔 드시겠습니까?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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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세번째 시집.

로트레아몽과 보들레르에 매혹되었던, 매혹되는 한 시기를 홍역처럼 거쳤던 때, 최승자는 달콤했다.

나는 어쩌면 설익은 염세주의자였는지도 몰랐다. 스물이 안되었던 나이부터 세상은 언제나 고함을 질러대는 검고 추악한 덩어리였고 그 속에서 한껏 맞은 뒤 제 상처를 핥으며 내는 어린 강아지의 신음처럼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드러내는 시들에 탐닉했다.

사춘기여서 그랬을까? 늦은 사춘기를 겪었다. 중학교 무렵부터 엄마는 딸년의 사춘기를 대비했다. 언제고 뻗어나올 그 시기에 상처없이 지나쳐갈 방도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딸년의 사춘기는 오지 않았고, 엄마는 이미 지났나? 의아해하다 지났나보다. 확신하고 사춘기대비책을 모두 폐기했다. 그 때, 모든 방비들이 무력화되었을 때 사춘기는 시작되었다. 애써 준비한 방책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감당해야했던 딸년의 사춘기..엄마의 고생은 차마 말하기도 어려울만큼 ...

'딱 같이 죽었으면 좋겠더라.' '진짜 내가 낳은 게 맞나 싶더라' '자고 있을 때 얘를 데리고 세상을 떠나는게 죄를 덜 짓는 길일까 싶더라..' 라고 엄마는 그 한 때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 때는 그랬다. 분명하고 선명하고 노골적이며 파괴적인 에너지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뛰어들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괴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것이 분명하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싸워봐야 이겨내지 못할거라면 제 상처라도 핥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상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아물고 있는 살집 사이로 삐집고 나오는 선홍빛의 피의 움직임에 그 비릿한 맛에 중독이 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최승자를 읽고 상처를 읽고 분홍빛으로 꿀렁대는 내 속의 모든 상처받기 위해 준비중인 것들을 상상했다.

이 처절한 여인을 통해서..

시를 쓰고 짓고 만드는 이가 아니라 시를 토해내는 이 여인을 통해서 말이다.


빛나는 눈동자를 연인의 눈 속에서 찾기보다 제 눈알을 뽑아 들여다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듯..최승자의 시는 본래적이다.

태초에 그 시어들은 그렇게 맞추어 쓰여지기로 약속한 설명서가 있었고, 최승자는 그 설명서를 엿본게 분명했다. 그 댓가로 시를 앓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완벽하게 말해지는 시들..그 사이에 빨갛게 배어나는 선홍빛 피처럼 배어 나오는 그 녀의 신음.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고통의 춤/ 중에서)>


<촛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심장이 타고 있는 동안은

결코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 (기도하지 않으리라/중에서)>


이 결연하고 영민함. 시를 토해내기 위해 시의 비밀을 엿본 댓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말은 차라리 시리다.


최승자는 무녀일지도 모른다. 시와 사람의 경계에 서서 시의 신탁을 전하는, 온 몸으로 시를 받아내고 사람의 말로 풀어내는 고단함을 기꺼이 수행하는 무녀.

참혹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잔혹하리만큼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쏟아놓는 시.

이것봐요 내 심장은 이렇게 뛰어요. 이..것..좀 ..보..세..요..

여기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내 것이예요. 이렇게 맑은 피를 보셨나요?

자신의 심장을 꺼내들고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그녀가 최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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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타샤 2016-05-31 09:5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신탁을 받는 중이시겠죠? 2010년 기사로 본 야윈 근황이 전부라서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