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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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상을 받았다는 낭보를 아침에 듣는다.

천박한 기사 헤드라인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를테면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을 제치고...따위의..

표현 방법은 저급했지만 반가운 소식임에 분명하다.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난 해 책 좀 읽는 다는 사람들을 분노조절장애인으로 대거 만들어버린 신경숙이랄지..

맨부커 후보로 확정된 후로도 난리가 아니었다. 수상까지 했으니 쾌거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왠지 찢어지게 가난한 집 둘째가 어느날 도지사 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옹색한 장면이 그려진다.

어쩌면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더 이상 뒤를 이를 형제도 자매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집에선 오로지 이 둘째의 이야기만 끝없이 되뇌이며 자족하며 여전히 빈한하고 옹색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뭐..그렇다는거다.

희랍어 시간을 읽고 소년이 온다를 읽고 채식주의자를 읽고..노랑무늬 영원을 읽고..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를 읽고..음..더는 딱히 기억나는게 없다.

언젠가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감이랍시고 끄적여 둔 글에서 '한강의 시가 더 좋았다'라는 뜬금없는 정리를 했었다.

그녀의 작품들에 배어있는 어떤 리듬은 다분히 시의 리듬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길게 써낸 서사.

아직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파동이 그 안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회상을 읽는다.

<그해 늦 봄>..그해 늦봄의 붉은 시간이 그려졌다. 개인적인 유추일것일테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은 탓인지 내가 그리는 그해 늦봄은 5월이다.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그 거리는 광주다.

원한과 분노와 상실과 그리움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부서지고 깨지고 외면된 채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은 아무리 생각해도 광주다.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어김없이 5월은 돌아오고 끈질기게 돌아오고 영원히 돌아올테지만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다. 사과와 단죄는 여전히 멀고 왜곡과 조작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면 온기가 빠진 텍스트만이 그날을 증언할지도 모른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일지도 모를 하루 하루를 지나며 조금씩 희석되는 그해 늦 봄의 사건. 증언이 회상이 되는 시점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한강의 뿌리는 어디인가 궁금해졌다. 폭력과 슬픔을 끌어내는 주술사 같은 그녀의 펜이 어디로 향할지도 궁금해졌다.

시집 한 페이지에 적힌


몇 개의 이야기 12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단촐하게 적힌 시를 끌어온다. 물기없이 단단한 슬픔..그것이 그녀의 펜의 방향일까 라고 짐작만 한다.


쾌거를 들으며 조심스런 응원을 한다. 이제 그녀는 상품이 되어버렸을거다. 그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잘 팔리는 한강이 될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세공되어 진열장에 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원석의 단단함을 틀어쥔 작가를 기대한다. 단단한 슬픔을, 줄줄 흘러내리는 물러터진 슬픔이 아닌 눈물을 덮어쓰고 견고해지고 뾰족해져 그해 늦 봄 누군가 들었을 무기처럼 글을 썼으면 좋겠다. 단단하게 얼어붙어 이켠의 설움에서 저켠의 희망으로 의심없이 건너도 좋을 그런 한강이었으면 좋겠다.


회상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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