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들이 가는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

멍석말이를 당한 몸으로

콩나물시루도 아닌데 꼭 조여져서

육시를 당한 몸으로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닌데 잘게 토막이 나서


나란히 누운

치즈복자, 참치복자, 누드복자들

순교의 뒤끝에서 식어가는 밥알은

김밥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버려야 하는

헐거운 육신이다


김밥들이 가지 않는 불신지옥도 있을까

버려진 몸들답게 김밥들은 금방 쉰다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

계란은 처음부터 중국산이야


마음이 가난해도 천오백원은 있어야

천국이 저희 것이다


천국에 대한 약속은

단무지처럼 아무 데서나 달고

썰지 전의 김밥처럼 크고 두툼하고 음란하지

나는 태평천국의 난이

김밥에 질린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 생각한다


너희들은 참 태평도 하다

여전히 천국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복장 터진다는 말은 김밥의 옆구리에서 배웠을 것이다

소풍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속담도

쉰 김밥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깨소금이 데코레이션을 감당하는 그 나라,

김밥천국

자기들끼리만 고소한 그 나라 바깥의

불신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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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을 꺼냈다. 우중충해지면 가끔 꺼낸다. 우중충해진다는 건 명확하지 않음에서 온다. 우울함도 그렇다.

불안과 불명확함이 가져오는 일종의 혼란이며 견디기 위해 쓸데없이 에너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실이 그 감정을, 혹은 증상을 악화시키곤 한다.

그럴 때 꼬리 치는 당신을 꺼내거나 미주알 고주알을 꺼내거나 생각하는 연필을 꺼낸다.

권혁웅의 책들이다. 어떤 사물과 대상을 오래 또렷이 들여다보고 건져내는 또 다른 이야기들..과학적이거나 분석적이라기보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잘도 찾아낸다.

빨간 사과를 보고 달큰한 과육이나 빨갛거나 파란 껍질, 흰 사과꽃을 떠올리거나 잘 갈아서 주스를 만들고 파이를 만들고 잼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내기보다는 빨간 사과를 손에 들고 사과보다 빨간 볼로 웃었던 사과향이 나던 그대나 사과맛이 날 것이 분명한 입맞춤을 꺼내는 것. 사과의 그림자마저도 붉을 수 있다고 귀뜸하는 여유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말이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울었고 나는 김밥천국에서 토막난, 육시를 당한 김밥을 마주한다.

때때로 식사시간을 놓칠 때, 김밥천국을, 김가네를 들어간다. 가지런하게 누운 시커먼 김밥을 입에 넣으며 간혹 생각한다.

어떤 주검으로 채워지는 생기.

김밥 천국에서 김밥 한 줄을 앞에 놓고 따끈하게 데운 다시다 푼 물을 앞에 두고 읽고 싶어진다.

한 조각씩 입에 넣으며 "허기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라며 김밥의 명복을 빌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의 허기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본분이 드러나는 복자들. 아무리 여며도 풀리고 터져나오고마는 속멧 것들을 굳이 감추지도 여미지도 않는 순정함.

어차피 허기진 영혼은 흩어진 것들을 야무지게 주워 입 속에 넣고 하나가 되도록 씹어삼킬 것이라는 믿음.


어쩌면 천국은, 혹은 불토는 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어느 곳을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다만 사람의 세상에 머물거나 사람의 세상에서 내쫓겨지는 순간만으로 생의 굴레를 마감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끝없이 이어지는 허기와, 그 허기를 채워줄 수없는 주검들을 감당할 길이 없다. 때론 허기를 가장한 절망이 짐짓 선한 눈빛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네 생을 위해 댓가를 치르는 주검들을 봐. 이 짓을 더 해야겠어?. 너 하나만 없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의 삶이 더 연명이 될지 생각해봤어?' 따위의 가당찮은 요설을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살아감의 고리는 어느 한 곳도 풀려서는 안된다. 그 연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 없다.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나와 닮은 또 다른 내가 자리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이어지는 삶의 고리는 숭고하지 않을까?

자괴감은 허기지지 않았음의 증거다. 오만하게 자라버린 자기연민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우울은 거울이 된다. 거울 저 편의 나는 조금 덜 우중충하고 조금 덜 자조적이며 조금 덜 밉다.

입을 크게 벌리고 김밥 한 조각을 맛있게 우물거리는 모습은 살아가야 할 정당성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믿어야 한다.


엄마는 소풍날 김밥을 싸주지 않았다. 신식 엄마는 샌드위치를 싸주었고, 주먹밥을 예쁘게 치장해 넣어주기도 했다.

나는 늘 내 도시락을 내어주고 연주 엄마가 싸준 연주의 도시락을 먹었다. 계란과 김치가 전부였던 참기름내가 좋았던 연주의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연주 엄마의 손가락을 빨아먹으면 세상의 모든 맛이 다 날 것 같던 김밥.

김밥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첫번째 힌트 같은 걸지도 모를 일이다. 죽어서도 기억할 이승의 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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