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
소 먹이는 영정이가
소똥 한 트럭 싣고 왔다
삼년 묵혀 말린 소똥이란다
그래서일까, 고슬고슬한
소똥에서 똥내가 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제 내 똥이니까
똥오줌 냄새가 나지 않는다
텃밭 앞에 받아둔 소똥을 낸다
얼갈이배추 고랑에도 내고
열무 아욱 대파 고랑에도 낸다
호박 구덩이에도 한 삽
오이 구덩이에도 한 삽,
한 삽씩 내다 서운해서
한 삽씩 더 보태어 낸다
소똥 내던 삽자루 놓도
두 주 만에 처가에 간다
길이 어지간히 막혀
처가 식구들조차 늦은 밥상을 받는다
딸애 봐주시는 장모님이
네 살 딸애가 싼 오줌을 받아
옥상 스티로폼 상자에서 키웠다는
쑥갓과 상추를 내놓으신다
풋것이 하도 쌉싸래하고 달아
어린것이 벌써 애비를 먹이는구나, 생각다가
한참 소똥 얘기를 늘어놓는데
모두가 숟가락 내려놓고 내 입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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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쪼끄만 어린애였을 때, 내 유년의 대부분을 들여다본 외할머니는 늘 묻곤 하셨다.
현이는 커서 뭐가 되련?
요술사!
요술사가 되면 뭘 하련?
꽃이요~사탕이요~토끼요~ 이렇게 만들어 낼꺼야.
그게 좋으니?
응.
그럼 할미는 거름으로 맨들어주련?
거름? 똥? 더러워.
더럽긴 내 먹은거 나온건데 똥이 더러우면 내가 더러운거다. 할미는 좋은 거름으로 만들어주려므나.
나는 요술사도 뭣도 되지 못했지만 TV에 농촌이 보이면, 농부의 땀이 읽히면 무던히 외할미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언젠가 SNS에서 농사 짓는 분과 히히덕대다 '똥거름 되는게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진심이었다. 그 대답을 내 놓는 순간 외할미와 요술사와 영악한 손주년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것인가가 과제처럼 주어진 시간을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천착해가는 지금. 무엇을 쌀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다.
내 삶의 찌꺼기가 남은 이들의 생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질수록 그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한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을 것이라면 잘 썩은 똥거름처럼 냄새조차 없이 포실포실 부서지며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썩음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쓰인다면 좋겠다는 과한 욕심도 부려본다.
박성우의 시들을 하나씩 넘기며 어떤 이야기들을 꺼낸다.
시들이 그려내는 풍경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이 순박하게 어울리고 순정하게 드러난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자주 자주 가고 싶어진다.
거기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좋아서, 아무도 없는 쓸쓸함이 좋아서, 북적대는 숨소리가 좋아서, 영악스럽게 들고 있던 짐 하나를 슬쩍 숨겨두고 마치 잃어버린 양 다시 찾으러 가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어슬렁어슬렁 길을 잡고 싶어진다.
키작은 자두 나무가 만만하게 서 있겠지. 별볼일 없는 자두 나무가 새빨간 열매를 장하게 매달기 전까진 만만하기만 하겠지.
잘 묵힌 된장을 풀어 거칠게 손으로 뚝뚝 잘라넣은 푸성귀를 넣고 붉은 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희고 푸른 양념을 넣어 누렇게 끓여낸 할미의 된장국처럼.
아무렇게나 숟가락을 집어넣고 맛있게 입속에 굴리다 시원하게 꿀꺽 삼키는 순간의 포만감.
그런 시들이 빼곡하다. 허리를 숙여 김을 매고 대를 세우고 돌아 온 저녁. 푸근하게 내어놓는 밥상 같은 시들.
입으로 들어가 똥구멍으로 빠져나와 다시 입으로 들어가는 간단한 순리를, 내 몸은 어쩌면 세상의 정화기관일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는 시집. 잘 묵힌 똥거름 같은 시집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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