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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어떤 기사.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외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본다. 정유정도, 황정은도..소위 러브콜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한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들이라는 게 흥미롭다. 신경숙의 사태(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후로 보여 준 태도며 그녀의 흑기사들의 모습으로 보더라도)를 겪으며 좀처럼 동의하기 힘든 그녀의 작품성의 배경에 해외진출이라는 현상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것은 때로 외국에서도 공감이 갈만한 이야기였던거야? 난 도대체 뭘 읽은거야? 하는 일종의 자책같은 느낌도 갖게 했다. 그리 오래가지 않은 자책. 작가와 나의 진동수가 맞지 않는구나로 자의적 결론을 내려버렸다. 마치 열광하는 하루키에 열광하지 못하는게 취향이겠거니 하듯..
어쨌든 한강의 기사를 읽고 트라우마처럼 신경숙을 떠올렸다. 책장에 꽂혀있을거라 생각했던 책이 찾아지지 않고 책상 귀퉁이에 뜬금없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가 눈에 뜨였다.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읽은 후 나는 한강은 오히려 시가 더 좋네. 라고 평가했었다.
기사를 읽고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뭔지 궁금해졌다. 바깥세상에서 보내는 환호에 같이 환호할 수 있을까 싶은 어떤 기대도 실려있었다.
#2. 이야기
처음 책을 펼치던 몇 해 전에도 참 재밌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단편으로도 서사는 충분했고 그것이 하나로 엮여서 조금 더 큰 그림을 보여주는 구성이라니..참신하다고 말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서로 다른 화자가 끌어가는 이야기.
나와 나의 아내 영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꿈을 꾼 이후 처절하게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해하지 못하는것이 차라리 나을까? 일정부분 이해가 되어지는 것이 혼란스럽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 손목을 긋는 영혜. 채식주의자를 벗어나 스스로 식물이 되려한다.
나의 처제 영혜. 그녀에게 남았다는 몽고반점. 그것이 궁금했다. 작업에서 손을 놓은 오랜 시간 머릿속을 스쳐가 강렬한 영감은 처제를 불러낸다. 세상에서 한 발쯤 벗어난 처제는 본래의 모습을 지녔다. 몽고반점. 그 순수함이 남은 처제는 식물일지도 모른다. 가장 동물적인 욕구를 가장 식물적으로 이루어가는 그 순간. 어쩌면 태고의 시간을 만나는 희열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장면을 처제의 언니이자 아내인 인혜에게 들키기 전에는..
나의 동생 영혜. 살아가는 일이 간단치 않지만 열심히 살았다. 조금 더 부지런히 살면 조금 더 행복할 거라고 누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동생 영혜와 남편의 비디오를 보기 전까지는..가장 가까운 두 사람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영혜의 상태는 날로 악화되고, 새가 된건지 나비가 된건지 남편은 날아가버렸다.
집착을 읽는다. 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채 영악한 뱀처럼 맹독을 품고 또아리를 틀고 있다. 거기 가만히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으니 그것이 이미 진정된 기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치명적인 맹독을 만들고 있다고는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두려움은 시작된다. 낫지 않은 상처. 낫지 않는 상처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은 얼마나 위태로울까? 생명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마주한 순간의 두려움이 그 상처의 시작이라면 얼마나 두려울까를 생각해본다.
빠져나가고 말 생명, 폭력적으로 빼앗긴 생명. 저항하지 못하는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집어삼키는 사람. 서로의 생명을 탐하는 생존에 대한 집착.
영혜는 스스로 식물이 되고자 한다. 식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기적인 삶에의 집착이 거기에 있는건 아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며 순수로의 회귀, 평온으로 들어가는 길은 과연 아름다운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완곡한 폭력은 영혜에게서 시작되고 발현되었다고 읽는다. 오독이라도 할 수 없다.
#3. 관계
관계의 서사는 치밀했다.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속내를 짚어내는 예리함. 영혜의 행동을 일정부분 이해하는 남편. 동생과 남편의 부적절한 행동을 어느 한켠 이해하는 인혜.
어쩌면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고도의 지적존재들일까? 이런 반응을 품는 건 심술이다. 고독과 자기부정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삶을 엿본 댓가라면 감수해야할 일말의 부러움이다. 속속들의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고 오해하지만 그 오해의 적절한 변이가 기대되는 인물간의 호흡이 대단했다.
도대체 어디에 가면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거냐고 묻고 싶을만큼 ..소설이니까, 그게 다만 허구는 아닌거잖아..창조된 인물일 뿐이야..그래도 허구라고는 하지마.
이런 부대낌이 내내 속에서 들끓었다. 상처를 품고 상처를 주고 살아가지만 끝없이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사람들. 무서운 말이다. 끝.없.이..
만약 내가 어느 날 고기 없는 밥상을 차렸다고 치자.
"고기 안먹기로 했어?" 라고 식구가 물을거다. "응"
"왜?" 라고 물어올게다. 그 때 "꿈을 꿨어" 라고 답을 준다. 그 답을 하고 난 후의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거나 "뭔 소리야?"하는 질책일게 분명하다.
그것이 아쉽거나 속상하기보다 그것이 재밌고 흐뭇하다. 저마다의 삶의 방식, 이해의 방식, 근원을 찾는 방식이 다르다.
이 지점에서 오래 전 읽었던 이 책 '채식주의자'에 대한 높지 않았던 공감의 이유를 찾아냈다.
#4.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개인주의에 익숙한 나라들에서는 좀 더 매력적일 수 도 있겠다.
살아가는 일에 늘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으려 한다. 본질 혹은 그 근원에 대한 고민은 사치스러울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하고, 그 난망함에 때로 세살 아이 떼쓰듯 버둥대기도 한다.
문득 생각했다. 그게 중요해?
누군가의 외로움, 집착, 관계, 슬픔, 두려움과 분노, 설움..그것은 그 자체로 있는게 낫다. 어느 것 하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다만 지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온 마음으로 거부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분명한 건, 나와 어떻게든 연결된 타자는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한 반문이다.
고르게 서로에게 카타르시스가 전이된다면 다행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강요되거나 암묵적 이해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삶의 본질로의 회귀 혹은 위로의 몸짓은 이기적인 노래일 수 있지 않을까?
서러웠다.
어느 한 때, 내가 살며 지나온 젊은 어느 때였다면 고개가 떨어질만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며 읽어냈을 이야기.
계산이 빨라진 지금..나는 손해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몸에 좋은 채소가 있지만, 근기가 있어야겠다며 고기를 집는 것이다.
산다는 건 채식주의자나, 육식주의자나, 기혼이나, 미혼이나, 남은 자나, 떠난 자나, 확인이 되는 자나, 불명확한 자나 모두에게 고르게 녹록치 않다.
그래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