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권선징악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은 정의는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의 정의, 어떤 이들의 선만이 힘을 갖았고 대다수의 정의와 선은 짓밟히곤 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저항흔(痕)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는 힘 없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수탈을 당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저항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물적 조건들 뿐만아니라 신념과 인간성까지 말살당했다.
저항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불가항력..이만큼 무기력한 이유가 또 있을까..
가장 약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갔다. 정신이 마음이 육체가..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 방어기제가 되었고 저보다 약한 이들을 밟음으로 자신의 입지를 보장받는 영악함을 키워냈다. 그렇게 사분오열이 되어지는 사람들...급기야 피해자들에게 조롱과 악담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의라는 이름으로 쏟아붓고 있다.
얼마 전 한일협약이 이루어졌다.
위안부문제를 해결한 대통령이라고 자화자찬이 이어졌고 정작 피해 할머니들은 소외된 저들의 정의와 선을 구현해낸다.
조악한 근거들을 들어 최선이라고 했다. 팔 수 있는 건 전부 팔아먹고 야반도주를 꿈꾸는 간교한 여편네처럼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더불어 그들의 편에 서서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또 한편 가엾다.
대승적이라는 말은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의미로 바뀌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오랜 저항의 시간을 기억해야한다.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불의에 저항했던 기록들, 그들의 저항흔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저항은 송곳처럼 어디서든 뚫고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이것이 법정싸움으로 비화된 것에는 우려를 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배와 피지배, 그 사이에서 동격의 사람들에 의해 체결된 정당한 계약도 뭣도 아니었으며 이것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자발적 종군 위안부도 개중 있었을 수 있다. 포주가 있었을테고, 한국인 모집책들이 있었을게다.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상상조차 불가능한 폭력적인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다. 일부의 그럴싸한 상황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전체의 모순을 뒤엎을 일반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양국의 화합을 바라는 마음에서 서술했다는 책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문제제기와 새로운 시각의 제시를 넘어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없이 용서와 화합을 바라는..그러지 못하는 것을 졸렬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다 읽진 않았다. 읽다 던져버렸다. 그 책을 더 구체적으로 읽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불가역적 협의란 없다.
불가역적일 수 있는 건..위안부 할머니들의 시간과 고통. 그것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이고 저항의 흔적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