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긴장한 채로 지내는 밤은 길고 예리했다. 솜씨없는 견습 마녀가 휘젓는 주걱처럼 잘 섞이는게 아니라 한쪽으로 맥없이 쌓이는 생각들은 고약한 냄새를 내며 눌러붙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눈은 따가웠고 잠은 잘 수도 없었고 오지도 않았다. 베인 손가락을 입에 물고 두리번대다 발견한 반창고처럼 가방속에 처박혀 있던 책을 꺼내 읽는다.
살아있음과 죽었음의 경계를 아슬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꽤 오래 화를 누르고 서러움을 누르고 지냈다.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싶다는 생각만 검은천을 덮어쓴 콩나물처럼 자랐을 뿐 결국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속을 끓였다.
그 답답하고 꾀죄죄한 단어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하기까지했다. 
작가는 나의 것과 다르지 않은 말들을 솜씨좋게 펼치고 모으고 까불고 달래서 새로운 말들을 펼쳤다
조금 더 파고들어 끝장을 보는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들을 어렵고 진하게 풀었다.
읽을 순 있지만 읽혀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그건..내 속의 양심 혹은 덜여문 정의감의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야만 읽혀지는 부분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말들로 내가 알지 못했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버릴 것이 거의없는..
손끝이 야무진 어미의 도시락같은 맛이다.

혈육이라는 말을 발음하며 비릿하고 고소한 선짓국이 먹고 싶어졌다.
'뭐라도 먹어'
'알았어'라고 대답만하고 자꾸 거르는 끼니와 끼니 사이에 먹고싶다는 의지가 생긴것은 오랜만이다. 살고 싶은것이다.
나는..작가의 꾐에 넘어가고 싶은것이다.
살아있음의 참혹한 의미를 기꺼이 마주하고 싶어졌다.

중환자보호자 대기실에서 꾸역꾸역 읽었다.
혈육들의 걱정과 기도가 술빵처럼 부푸는 그곳에서..

 

문득 내민 손끝에 잡혀와 하릴없이 읽혀지는 어떤 책들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스쳐지나간 이상형처럼 오래 잔향이 남곤 한다.

주말 내내..읽으며 상처의 위치를 확인한 책이다.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다. 어디쯤 있는지 왜 생긴건지를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손에 잡힌 책은..사십사와 양철북.

  그리고, 얼마전 쓰러졌다는 시인 이흔복의 시집이다.

 

 

 

 

 

 

 

 

시간은 늘 사선으로 흐르고 나는 하릴없이 베이고 있는건 아닌지 싶어지지만, 상처의 위치와 깊이를 가늠하는 것으로 고통을 덮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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