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문학동네 청소년 27
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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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 들통을 들고 이른 아침 선지를 사러 나선 남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도축장을 끼고, 도축장과 엮여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어린시절의 풍경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살고 있는 지리적 위치가 어디쯤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그 변두리로부터 우리는 걸어들어오거나 오래도록 변두리를 서성대며 삶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가난이 버즘처럼 피어났던 시간..특별히 잘난것도 없는 이의 이층 양옥집이 부럽기만 했던 시간..혀가 빨개지는 사탕 하나를 물고 있던 친구가 어느 나라의 여왕보다 멋져보였던 시간..그런 시간을 기억해낸다.

 

#1. 그 때

 

외팔이 두부장수 아저씨의 부지런함을 사람들이 칭찬했었다. 새벽 동틀 무렵 골목 끝에서부터 울려오는 딸랑이는 종소리와 김이 모락모락나는 두부 모판을 수레에 싣고 들어오는 두부장수 아저씨. 홀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산다고..두부 한모 사는 것이 도와주는 거라며 골목 사람들은 딸랑이 소리를 반기곤 했다.

하지만 두부 장수 아저씨가 딸랑이며 골목을 들어서기 훨씬 전 동이 트기 전. 먼저 그 골목을 지나는 사람도 있었다. 똥지게를 닮은 지게 양끝에 큼직한 네모 깡통을 매단 채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선지~팔아요. 선지..새벽에 떠온 싱싱한 선지.."

선지장수 아저씨의 존재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골목에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금기처럼 말이다.

시뻘건 묵같은 선지가 네모 깡통에서 넘치지도 않고 꿀렁대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온 날 새벽이면 엄마는 선지장수 아저씨를 기다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고요한 골목에 작은 진동을 만들때 엄마는 일어나셨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선지를 좋아하던 나도 덩달아 엄마 뒤에 따라붙어 선지 아저씨를 구경하곤 했다.

주황색 커다란 바가지를 내어주면 싱싱하고 붉은 선지를 담아 되돌려준다. 새벽 바람을 막으려 덮어쓴 모자와 둘둘감긴 목도리 사이로 슬쩍 비쳐보이는 눈매는 비밀을 간직한채 숨어지내는 어떤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도 두부장수 아저씨보다 부지런한 선지장수 아저씨를 칭찬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도 나름 건강을 유지하는 까닭은 엄마가 먹였던 <알맹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살코기는 껍데기야. 살도 갈비뼈도 내장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라고. 우리 황룡동에서는 허접스러운 껍데기를 먹을 필요가 없지. 우리가 만날 먹는 이게 바로 소의 알맹이 아니냐.".(...)

우리 식구들은 알맹이를 거저 얻다시피 해서 먹는 덕에 모두 건강했다. (p33)

 

#2. 사람들.

 

가난해도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줄줄이 삶의 모양새를 드러내고 '그래서 어쩌라고?'를 외쳐댄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과 맞물리는 시간적 교집합도 있다.

사뭇 '그때는 그랬지..그 때 내가 고생한걸 생각하면 말야~'로 시작하는 꼰대짓을 하기에 너끈한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래도 정은 있었지..

절박해서 그랬을거다. 결핍이 가지고 온 의지와 오기 같은 거.

함부로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악같은 것.

그래도 새끼를 품고 키우고 더 좋은것, 나은 대우를 해 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지만 그것을 서로에게밖에 풀 수 없는 그 상황은 답답하기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그 때와 닮아있다.

 

박탈감과 모멸감에 젖어 사는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언젠간 꿈을 이룰꺼야라는 기대와 희망도 모호한 현실은 어쩌면 그 때보다 막막할지도 모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백정이라 손가락질을 당하고, 부산물이나 먹는다고 무시를 당해도 살아낼 수 있었던 동력이 지금은 없다.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았던 것이다.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들어 오기 위해, 그 단하나의 목표로 모든 것을 내어준 것이다.

이제 중심이라 생각하지만, 웬걸..아직 변두리를 벗어나진 못했다. 게다가 변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동력마저 잃었다.

사람과 사람과 사람과 사람...

 

#3.

 

200쪽 남짓되는 책 한권을 후루룩 읽기 어려웠다. 장면장면에서 발목이 꺾이고 시선이 매몰되기 일쑤였으니말이다.

깊은 한숨과 삶에의 연민 때문에 '이렇게까지 후지게 책을 읽을 수도 있구나..'혼자 자책도 했다.

몰입.

자꾸만 시선을 잡아채 먼 시간 속으로 던져버리는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싶어졌다.

21세기 자본도 너끈히 (물론 전문성은 없고, 구체성도 없었지만) 읽었는데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사뭇 걱정도 되었다. 어디 먼 후진국의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진 않을까? 이 감정과 이 서사에 대한 공감이 과연 가능할까? 근현대사를 배우게 되는 싯점이라면 가능하기도 하겠다.

꿈이라는 것이 스스로 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꿈이라는 것이 결국은 깨질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도,

산다는 것이 어쩌면 피비린내나는 도축장 한가운데 같을 수도 있다는 것도.

생생하게 읽어낼 수도 있겠다.

 

결국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이다.

겉으로야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지만, 딱히 나아진 것도 없는 현실.

우리 아이들, 혹은 나는..아직도 변두리가 아닌 척하는 변두리를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보면 변두리..그곳에 뿌리를 내린 아카시아나무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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