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시인선 65
민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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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목의 시집을 편다. 시인의 이름은 '민구', '배가 산으로 간다'는 제목을 단 시집이다.

배가 산으로 간다? 굳이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들을 훑어본다.

房, 공기, 동백 투성이다.

목차를 읽어내리며 방-공기-동백-방-공기-동백-사과-방-공기-혀-방-공기-동백...

큰 틀 속에서 이어지는 시들의 제목은 언뜻 연작시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도 한다. 연작이며 연작이 아닌 셈이다.

시인의 시선은 따스하며 몽환적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잡고 앉은 사물들을 구스르며 의미를 주고 꿈을 꾸게 한다.

표제작은 아닌데도 내 마음에 또르르 굴러와 앉은 시 하나를 보자.

 

   - 빛의 사과

 

그림 속의 사과 하나가

내 앞으로 굴러왔다

잠시 뒤 바구니를 든 여인이 나타나

사과를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방바닥의 사과를 주워

송진 냄새가 진동하는 들판을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자 사과는

손바닥에서 뛰는 심장처럼

은은하게 빛이 번져 어두운 방구석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사과를 반으로 잘라서 삼켰다

나머지 반은 책상에 엎어두고

그녀가 그림에서 나오기를

멀리 점으로 묘사한 굴뚝의 연기와

소리없이 날아가는 철새들이

검은 우박처럼 방안으로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구부정하게 서 있다가

드넓은 포도농장을 가로질러

물감이 덜 마른 갈대밭으로 사라졌다

빗방울이 들이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쪽 사과를 집어들었다

추수를 마친 사내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빈 오크통을 굴리는 소리가

짤막한 천둥과 함께 들려왔다.

 

아..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홀로 앉은 방에 두어장의 그림이 걸려있었으리라. 정물화와 풍경화와 인물화가 어떤 주제도 이야기도, 일관성도 없이 거기 있었을게다.

문득 눈 안에 가득 들어온 빨간 사과가 마음에 앉고, 늘 같은 자세로 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여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으리라. 무엇을 담을지 결정된 것도 없고 무엇을 담아야 할지 묘연해진 여인은 빛나는 사과를 탐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비어있었고 계속 비어있는 바구니에 무엇이라도 담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조급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빛나는 빨간 사과를 든 자는 보란듯이 절반을 먹어치우고 절반을 책상위에 엎어둔다. 마치 다 읽지 못한 책을 엎어두듯이 말이다. 아니, 뭔가 비밀스러운 사연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엎어두는 것이다. 야속함은 이를데없다. 야박하기 그지없는 사과를 든 이는 나오라고 한다. 그 그림에서 나오라고 말이다. 거기서 나온다면 이 사과처럼 빛나는 심장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여인은 그럴 수 없다. 이만큼 걸어나온 것도, 먼저 사과를 달라고 손을 내민것도 그녀로서는 용기였으며 파격이었으며 자신의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돌아섰다. 다시 그림 속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더 깊은 갈대밭으로 들어가버린다. 그곳에 있으면 그림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욕망도 잦아들지 않겠는가.

스르륵스르륵 갈대의 제 몸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차라리 갈대가 되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인이 떠나고 나자 빗방울이 들이친다.

혹여 들킬까 빨갛게 적어두었던 마음을 그녀는 원치 않았다. 거기에서 나오기만 했으면..그랬으면 나누었을 펄떡이는 마음을 이제는 집어들어야 한다.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인 천둥소리..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되묻는 천둥소리로 짧은 꿈은 마무리가 된다.

시집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된다. 잠든 줄도 모른채 들어버린 잠 처럼..스스륵 시 속으로 끌어당겨 꿈 꾸게 한다.

정해진 이야기도 틀도 없다. 그저 꿈을 작동하게 하는 몇가지 기제들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런 식이다.

어릴 때 떨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모두 꾸어봤을 꿈이다. 그러나 꿈 속의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 떨어진다는 공통적인 상황만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시인은 그렇게 틀 하나만을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꿈의 틀을 세심하게 배치해둔다.

자..그럼 이렇게 말 해 보자.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시인이 던져 놓은 꿈의 틀 속에서 저마다의 꿈은 저마다 채색되고 이어질 것이다. 모두 같은 곳에 있으나 같은 목소리는 아닌 것이다. 사공이 많다.

그 누구도 틀리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옳고 그름의 구분도 없는 꿈을 들고 시인이 만든 배 위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한다.

이 배는 어디로 가는거지?

가긴 어디로 가?

산으로 가겠지.

배가 산으로 가도 불평하는 이는 없다. 그저 한바탕 웃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배에 오르는 순간 모두 뱃사람이 되어버렸다.

항해사도 선장도 아무것도 없이 저마다 노를 저어 산으로라도 가는게 어디냐며 호쾌하게 웃을 수 있다.

​완전하게 꾸며져서 완전하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시.

온통 비어버려서 비움으로 가득해져 버린 시.

너무 많아서 차라리 없는 그런 시.

너무 조용해서 들을 것이 많은 시.

​그런 다치지 않는 시들이 있다. 꿈이니까..

"배가 산으로 간다"​

돛을 올리자. 현실에 묵직하게 내려진 닻을 잠시 거두어보자. 공기를 타고 동백이 울울한 뱃길을 떠나보자.

꿈꾸기 좋은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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