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겨진 것들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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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이한 삶의 표현

 

어떤 이는 등에 소나무가 자랐다. 어떤 이는 기억이 또렷한 어느 장소의 벽돌이 되었다. 어떤 이는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허벅지의 부유방을 감추려 애를 쓰며 산다. 또 어떤이는 지독한 이명에 관계에 몸서리 치며 살아낸다. 또..또..또..

 

소설은 마치 샤데크 헤다야트의 글처럼 꿈과 현실이 모호하게 중첩되며 전개된다. 사실이 아닐거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빠져드는 스토리들. 작가는 시선을 잡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진다. 어쩌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힘을 더해주는 이율배반의 동력이 되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혀 사실 같지 않은 사실을 겪어내고 있기에 잠깐의 멈칫 거림이 있을 뿐 곧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건 아니었을까.

사실이 아닐 것 같은 일을 겪어내고 다시 사실인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소설 속에 나온 한 마디를 되뇌었다. '없네, 없군, 없네, 없군. 별 것 아닌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서운하던지. 없네 없군, 없네, 없군'(p22)  그것이 있을 때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허망함. 믿지 못하던 것이 실제 없어졌을 때 느끼는 그것을 상실이라 표현해도 좋을까? 원래 없던 것이었는데..마치 희망처럼.

"꿈을 꾸면 슬퍼진다"(p42)

어쩌면 불가해한 삶의 서늘한 설움의 시작은 바로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혹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게 되는 "꿈"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는 불가해성.

열개의 단편은 어쩌면 이런 발상이 가능하지? 싶은 모티브들로 이야기를 꾸려간다. 보통 기이한 전제들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갖는 거의 폭력적인 이해요구가 아닌 스스로 수긍하며 이럴 수 밖에 없겠군, 이런 반응은 가능하지..나라도 그럴꺼야..하는 동의를 하게 된다.

마치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 그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보고 들었던 사람인야이 목격자행세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2 깨알같은 자극들


책을 오래 읽게 되었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건 순간이었으나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째서? 글 속에서 만나는 노래와 시와 그림들과 존재들이 발목을 묶었다.

The doors,(soul kitchen)/The Beatles (Nowhere man)/최승자(개같은 가을이)/범고래..

읽는 동안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다시 찾아야 했으며 비틀즈의 노래를 불러야했고, 최승자의 개같은 가을, 매독같은 가을을 겪어내야 했다. 또한 먼 바다의 범고래를 끄적끄적 그려대며 알고 있는 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애를 쓴다. '잘 들어줘야 해'라고 ..말했으니까.

페이지 마다 그림을 그리고, 가사를 적고, 메모를 남긴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공통의 것들을 적어내면 어느 순간 이 서늘한 이야기들에 체온을 더할 수 있겠다 싶었던 영악한 계산이었다. 그러나..이것은 잠시 쉬어가는 텀이었을 뿐 이야기의 온도는 여전히 체온보다 조금 낮고 축축하다. 어쩌면 그것이 정상 체온은 아닐까? 인간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조금 낮은 체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혼자 의심을 해본다. 왜? 서늘한 이야기에 먼저 반응하고 몰입하게 된다는 건 온도가 맞는다는 말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바꾼다.

공통의 것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지워가는 것이 답에 가까워지는 길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경로를 바꾸자 이 이야기에는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 모든걸 인정하거나 모든걸 거절할 수밖에 없는 장치를 갖는다.

 

어떤 색으로 어떤 구도로 그려도 바다는 제 온도를 잃는 법이 없듯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그려내도 삶의 불가해성은 이해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다만, 묵묵히 살아가는 것 뿐.

 

<삶이란 두려우며 인생은 불가해하다고,(p86)>

<온전한 이해는 어려우며, 이해한다는 것은 가혹하다. 나는 종종 가혹하다, 라는 단어마저 입에 넣고 씹어 뱃속으로 삼켰다.(p87)>

 

 

#3. 섬세한 조립가.

 

똑같은 박스에서 꺼내 똑같이 작업을 해서 만든 프라모델이 어떤 이의 것은 마치 실제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이의 것은 말 그대로 장난감처럼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똑같은 솜씨를 가진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설명서와 조립도를 두고 하나씩 맞추어 가는데 왜 그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일까?

섬세함이다. 똑 떼서 따닥 조립을 해도 되지만 조금 더 섬세하게 칼질을 하고 조금 더 어울리게 조립을 하는 것을 솜씨라고 부른다.

염승숙은 참 솜씨 좋은 조립가다.

누구나 쓰는 단어들을 살짝 바꾸거나 적절한 단어를 넣어 말의 힘을 글의 생명을 피워낸다.

흔하게 쓰이는 단어들과 같은 의미이지만 조금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 그곳에 넣는다. 그냥 읽어내어도 되지만 자꾸만 사전을 뒤적이며 그 본의를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의미를 알고 내가 아는 단어로 대체해도 의미는 전달이 되지만 살아나진 않는다.

 

새로운 혹은 알고있는 의미의 다른 표현.

더덜뭇이, 출무성하게,비습하다,곱다시,복대기다,구두덜거리다,아물대다,수다히,싱거이,몸피,열없이,차끈하다,음충한,울가망한,흐무러지다,허룩한,자춤대면서,모짝, 이기죽거린다, 가리사니,시서늘한,해찰스레,가풀막진,홈쳐때리는,...

 

페이지 윗쪽에 적어 둔 단어들..페이지 아래쪽에 그려둔 얼굴이 검은 양의 얼굴, 범고래의 비상..페이지의 뒷면에 적어내린 노래의 가사와 시들..

염승숙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엔

많은 것이 남겨졌다. 불가해한 삶을 이해해보려 애쓴 어떤 사람의 시간이 끄적거림으로 오롯이 남겨져 있다.

 

#4. 산다는 건

 

어쩌면 끊임없이 꿈을 꾸어야 가능한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은 아니겠는가. 쉼없이 버둥대며 살아가는 팍팍한 삶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준비되어져 있는 공평한 곳은 아니다. 어쩌면 힘이, 어쩌면 욕심과 모함, 그리고 사랑이라 불리우는 집착과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이별따위의 상처들을 누더기처럼 기워가며 견뎌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마지막에 어떤 보상이 준비되어져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마지막을 본 이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이 다른 무엇이 되어 다시 돌아온대도 고작해야 켜켜이 쌓여져 또다시 짓눌리거나 짓누르거나 깨져서 교체되어질 벽돌의 모습정도 일 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과정을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달려간다. 때때로 꿈도 놓아두고 말이다. 동력을 끊고서라도 달리는 것이 중요해진 지금, 과연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제 삶의 주인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 하고 있는가? 염승숙의 소설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묻고 있다.

참 황당한 설정이다 싶지만, 참 대단한 시선이다 싶어지는 단편들을 어쩌면 좋을까?

 

잊혀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 말이 단단하게 박혀 빠지지 않는다. 잊혀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기억되고 싶다는 말일테지. 누구에게?

그 누구를 갖고 있는가.

기억될 그 누구. 그 누구를 삶의 결과물처럼 남겨놓았는지..

 

내 삶의 마지막을 보고 다시 한번 기억될 그 것은 결국 사람일테지

혹시..내가 잊어버린 사람은 없을까? 내가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남겨진 존재는 아닐까?

 

 

<기억해. 인간은 본래부터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은 다만 사실일 뿐 슬퍼도 기뻐도 할 필요 없는 거야. 네가 소설에서 현실을 슬프게 그렸다고 해서, 정작 그 현실이 슬퍼지는 일은 없지. 중요한 건,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건, 현실을 공평하게 그리면서, 인간이 자기가 놓인 위치를 어떻게 넘는가 하는 거야. (p309)>

 

산다는 건.

나의 위치를 넘는 것? 그 이전에 나의 위치가 어딘지는 알고 있는거야?

책을 덮으며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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