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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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삼중주

 

소라(小蘿), 나나(娜娜), 나기(鏍基) .

연주자는 세명이다. 테마는 흔하디 흔한 '삶'으로 결정한다.

저마다, 애자, 모세, 그의 각기 다른 서브연주자들을 두고 있다. 여기서 순자는 (때때로 애자도) 전 영역에 걸쳐 베이스로 작용해주기도 한다. 주제가 깊어질 때, 혹은 변주가 시작될 때, 애자, 혹은 순자가 그 시작을 맡아 자연스러운 변주를 유도한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다. 나기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낸 친구이다.

책의 내용은 각각의 파트를 연주하는 대표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악장을 맡은 소라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금주씨와 애자의 큰 딸이자 나나의 언니인 소라의 연주는 서사적이다. 금주씨를 잃고, 애자의 상실을 보고, 서둘러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소라다. 완벽하게 껍데기만 남아가는 애자를 보는 것도 소라의 몫이었고, 나나의 불안을 보아내야 하는 것도 소라였다. 그 단조의 냉랭하고 불안한 음조를 놓치지 않도록 나기와 순자의 협주가 있어주었다. 조금 이탈을 해도 주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다독여주는 그 마음을..새끼를 먹여 본 순자의 음식처럼 소라가 잠시 기댈 협연자가 있었다.

 

두번째는 나나의 연주이다.

모세의 아이를 가졌지만 모세와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수없이 계속 꾸어댄 태몽 때문에라도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 아주 단순한 것에서 갖게 되는 결기는 어디서부터 오는건가..

나나의 연주에서 우리는 주제가 되는 '계속해 보겠습니다"를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다. 주제부가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일 수도, 자칫 주제부를 놓쳐버릴 수도 있는 오묘한 지점이 되는 것이다.

혹여 놓쳐버린걸까? 계속해보겠습니다. 라고 던져놓고 나니 너무 강조되는 주제, 그러나 곧 나나의 연주는 주제를 흩뜨려버리곤 한다. 사실, 주제를 놓치거나 강조하는 것이나 별 의미는 없다.

중요한건.

"계속" 해. 본다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궁금하든 말든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수도 있고, 궁금해지고 싶어서 이제는 제발 궁금증을 유발시켜줘라는 간절한 마음이 계속함을 유지시킬 수도 있고, 나의 테마와 닮아있음에 흠칫 놀라면서 다음을 원하게 되는 것일수도 있다. 어떤 이유여도 상관은 없다. 계속해보겠다는데...

 

마지막 나기의 연주는 순자가 처음을 끌어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나기와 순자는 모자관계인 것이다. 애자와 소라 나나가 모녀관계인 것처럼..

나기는 '너'의 존재로 변주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소라와 나나가 이어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음조로 변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주제부는 줄곧 같은..

나기의 변화보다 훨씬 빠른 변화를 이루어 냈던 '너'는 그렇게 폭력적이었으나 변함없이 '너'일 수 밖에 없다.

너의 소식을 기다린다. 어디쯤 네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지만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를 기다린다.

왜냐하면..이 기다림은 쉬이 마무리 짓기 어려운 음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가지의 변주가 이어진다. 계속해보기 위한 변주이고 이유이며 동기이다. 그렇게 '나비바'가 되기로 한다.

 

"모두가 공평하게 하나뿐이니까. 하나뿐이야. 하나뿐이라는 이름의 부족. 하나뿐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뿐이다. 너도 나도 결국은 이렇게 하나뿐이라는 부족으로 멸종하고 옆어지는 존나...."(p207)

 

공평하게 자신의 파트를 맡아서 존나 열심히 연주하고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때때로 잘 구성된 화음도 만들어내고 하지만, 비슷한 주제로 제멋대로 연주하는 것일 뿐이다.

지휘자따위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 입니다. (p227)"

 

이제 자신의 하찮고 무의미한 것들을 내어놓아보라고, 꼬드기고 있다. '도무지'라는 완곡한 표현을 끌어와서 말이다.

 

#2. 황정은의 불친절

 

황정은의 글을 그다지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야만적인 앨리스씨'나 '상류의 맹금류', '백의 그림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가 전부다.

그녀의 글은 중독되기 쉬운 위험이 있다. 어느 한 문장이라도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두 세 페이지 너머에서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다음페이지를 기대하는 동작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그녀 특유의 펼치기. (이런 개념들이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건 그냥 내 느낌에서 나온 것이니..) 하나의 문장들이 제각각 변화하며 이어지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며 되돌이표를 서너번 지난 음조처럼 마무리 될 때, 어디쯤에서 숨을 돌려야할지 막막해하다 만나는 마침표 앞에서 비로소 긴 숨을 내쉬게 된다. 마침표와 숨표가 동일시 되는 지점. 나는 그 지점들이 좋다. 마치 활꼴과 부채꼴이 일치하는 반원의 모습처럼. 어느것도 맞고 어느것도 틀리지만 그것을 굳이 나누어보지 않고 스스로 함정으로 빠져들게 되는 지점.

 

그녀의 소설들은 친절하고 부드럽고 맑아보이지 않는다. 퉁명스럽고 거칠고 음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알고 있다시피..같은 조도의 빛이라도 한참을 감고 있다가 마주하는 빛의 세기는 익숙한 세기보다 큰 자극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카타르시스일수도 자극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는 작용을 하게 한다. 보통은 전자의 경우이겠으나 아닌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눈물을 흘렸다고해서 감동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일거다.

 

황정은의 글을 읽는 건. 스스로 자청해서 자신을 옭아매는 짓(?)과 다르지 않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묶는다.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취약점을 골라 묶는 것이다. 나중에 풀게 될지 말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일단 단단하고 고통스럽게 묶는다. 그렇게 묶어두고 고통과 거래를 시작하는 것이다. 고해.

조금씩 줄을 푼다. 고해의 진정성만큼 푼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며 작품을 따라가며 하나씩 풀어낸 댓가로 고해를 하게 한다. 책 한권을 읽어내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만큼의 희열이 있을거라는 믿음 또한 거기 있다. 그 믿음의 근거는 다분히 '경험'이라는 미약한 것이겠지만..어쨌든 그 미약함을 틀어쥐고 황정은의 글을 읽는다.

 

#3. 책 속에서

 

너희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p12)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p187)

 

망가져갔다는 말은 그녀의 지금 상태를 표현 하는 말로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완성되었다거나 완전해졌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까. 오랜 세월 동안 점차로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고 완전해졌다. 껍데기처럼 그것을 그녀는 뒤집어썼다. 그녀에 관해 언제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에 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딸들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나타난 것처럼 조만간 벽 건너편에서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넓고 기묘한 공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p188)

 

#4. 이 책은

 

읽을 수 없다. 다만 감각하며 구석구석 반응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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