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경주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의 고도.

주말에 산책을 가자고 철썩같이 약속을 해놓고, 앓아 눕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늘 거기 있어서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임에도 큰 맘을 내야 가게 되는 곳.

천년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곳이라 그런걸까?

경주를 걸으면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 같다. 보도블럭 사이에도 담장 밑에도 누군가 꽁꿍 묻어둔 신비한 설화 하나쯤은 있을것만 같다.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었다.

그 때는 수학여행 = 경주. 그 외의 것은 상상도 계획도 안했던것 같다.

첨성대를 돌아보고, 왕릉을 보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사진을 찍고..깊은 밤 선생님들 몰래 압수 당하지 않은 불순한 음료를 마시며 놀았던 기억이 더 오래 더 많이 떠오르는 곳이 경주다.

그렇게 밤을 새워 놀고, 길고 긴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걸려서 되돌아온 곳.

어린 눈에, 친구들과 놀 궁리로 가득한 눈 속에 남아있는 경주의 이미지는 흐릿하고 빈약하다.

다만 뭔가 빛나는 이야기가 있겠구나 하는 기대는 있었다는 것이 빈약한 기억 속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경주의 지도..사실은 책의 표지다. 표지를 펼치면 이렇게 지도가 나온다. 나름 참신하다. 정혜윤의 '여행,혹은 여행처럼'도 그랬다.

책을 읽다 불현듯 경주에 가고 싶어진다면 요긴하게 쓰일것 같다.

 

#2. 주소록.

 

작가님의 경주 이야기는 구석구석 살갑다. 맛있는 빵가게와 갈비집, 산방등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앙증맞게 같이 쓰여있다. 꽤 유용하겠다.

핸드폰을 들고 '경주 맛집'을 검색해서 유명하다는 어느 곳을 가보는 것 보다, 이야기를 따라 이야기의 맛을 찾아간다면 나 역시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작은 따옴표 하나쯤 받아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주소록이라는 작은 제목을 붙여본다.

경주에 오래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따라 읽다보면 구석구석 찬찬히 안내하는 살가운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여행기가 아닌 산책기가 적당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조용히 걷는 것 만으로 숨을 쉬듯 이야기가 전개되고 따라가게 되는 ..

 

감은사지.

한 때 그랬다.

울적해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으면 훌쩍 차를 몰아 감은사지터에 가곤 했다.

흔적만 남은 그 터의 한 쪽에 쪼그려 앉아 저 위에 있던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했다. 왜 그자리에서 버티지 못했냐고 노려보며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세월이, 시간이 지나며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안은 그렇게 질 낮은 분노로 자책의 우울로 감은사지 터를 귀신처럼 걷게 했었다.

처음보다 깔끔하게 정리되고 연꽃이 무성하게 핀 연못도 보기 좋아졌지만, 나는 스산하기 이를데 없는 그 감은사지의 터가 좋았다.

넋을 놓고 앉아 꺽꺽 울어도 나무라거나 뭐랄 것 없던 텅 빈 자리..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서 구석에 쪼그려 앉으면 어둑해질 때까지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없던 그곳이

좋았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책속에서 만난 감은사터 이야기는 내 비밀을 아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설랬다.

이젠 조금 밝은 표정으로 감은사터에 가볼 수 있겠다.

 

#3.책 속 볼 거리.

경주에서 태어난 경주의 화가(?) 김성호님의 그림들이 볼만했다.

주로 경주의 새벽풍경들이었는데..

 

<새벽- 동네 슈퍼.>


<새벽-골목길>

 

두페이지에 걸친 그림들도 선선하고 좋다. 자꾸 "동네 점방"이라 부르고 "가로등"이라고 부르게 되는 저 두 그림은 제목을 혼용했던 미안함에 꺼내본다.

그림만 넘겨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4. 걸어본다.

 

걷는다는 건 시간을 딛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흘려보내는 시간, 겪어내는 시간이 아닌 시간을 딛고 이야기를 심는 일이라고 말이다.

굳이 경주가 아니어도, 굳이 오래된 도시가 아니어도 걷는 일은 생각을 널어 말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로 딛어 생각을 널어 말리는 것.

그것이 산책이리라. 걷기 운동이 아닌 산책이라면..

지도를 펼쳐 몇군데 길을 정하고 끄적끄적 낙서를 해가며 걷는 것도 좋겠다.

 

조만간 경주로 나들이를 가야겠다. 내 우울의 본부 역할을 충실히 해준 감은사터에 말이다.

 

 

월성에 봄이 무르익으면 맨발로 걸으리라. 초승달 같은 궁궐 땅을 휘돌아 문천이 완만하게 흐르는데 저 느림이 고도 경주의 속도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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