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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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으른 삶.
 
 
 

끊어진 풍선을 놓지 못한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저 풍선을 날려보내고 남은 손엔 빈 실만 후두둑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노랑 풍선이 있던 실, 붉은 풍선을 묶었던 실, 참치가 좋아할 파란풍선의 실..
끊어진 실을 놓지 못한다. 막막해서, 막막할까봐, 막막하고 싶지 않아서.


 
표지 앞면에 기울여 빛을 반사시키면 드러나는 글들이 있다. 올록볼록한 글씨들..그 글씨들을 읽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내 옆에 있어, 같이가.      귀찮아.

 

뭐가 그렇게 무서워?
             귀찮다니까.
뭐가 그렇게 귀찮아?
            어려워.
 
단지 표지를 훑어내는 것으로 이 서늘한 이야기의 온도를 감지한다. 녹녹치 않겠구나. 어디쯤에선가 또한 비슷한 경험과 시간을 끌어내겠구나.
몇번의 훌쩍임과 몇번의 한숨을 예비하기로 한다.
그것을 다 쓸지, 혹은 남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주체하지 못해서 감정의 과잉으로 몰고 가게 되는 추함을 미리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너구리, 참치, 날, 영수, 영식이, 희수, 엄마, 참치 엄마, ..고양이 침대, 파리, 호주, ..
몇몇의 이름과 장소를 내가 아는 어떤것과 바꾸어 놓고 읽어도 나쁘지 않다. 이런 느낌이 사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 아물고 있는 상처를 누군가의 상처를 보며
다시 기억해내고 딱지를 자꾸만 만지작대게 하니까 말이다. 결국 나는 이 소설 앞에서 내 시간의 어느 부분을 게워내게 된다.
이야기에 취한걸까? 아니면..체한걸까?
 
 
#2. 색.
 
홍매실과 파란 청매실과 노란 청매실이 생수통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분홍. 식용색소를 들이부은 알사탕들이다. 분홍색 알사탕이 가장 유해해 보인다.
불량식품이다. 캡슐을 열 때마다 분홍이 나오기를 빈다.(p23)
 
접시꽃은 주황이다. 호박색 같은 주황이다. (...)
상추에서 고추로 딸기에서 수박으로 바뀌었다. (p25)
 
파란 대문 앞에 고무대야가 있다. 접시꽃과 수박이 자라는 고무 대야 옆에는 파란 플라스틱 화분이 있다.(p26)
파란 대문을 지나 골목을 꺾으면 큰길이 나온다. 길 맞은편에 빌라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낡은 빌라다.
하얀색 페인트로 빌라 이름을 칠했다. (p27)
 
오색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탕도 유통기한이 있던가. 사탕들은 녹아서 엉겨 있었다. 노란 사탕, 오렌지색 사탕, 빨간 사탕이
엉겨 있는 덩어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죽을지도 몰라. 사탕은 달았다.(p85)
 
글의 도입부에서 만나게 되는 색색의 환(環)들과 풍경들이다. 원색의 대비 어쩌면 표지의 풍선들의 정체일까?
원색의 시간. 원색의 지배를 받는 시간 속에서 불량스러운 색일 수록 탐스럽고 유혹적이다. 그것에 한번쯤 혹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위험할줄 알지만 저질러 보고 싶은 욕구. 내것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어차피 분홍의 알사탕일 뿐이지만 그 유해함을 기꺼이 내 속으로 받아내겠다는
젊은 시간의 치기. 그 속에서 너구리는 참치의 색을 발견했을까? 참치는 과연 유해한 분홍의 알사탕이었을까?
 
 
#3.막막함
사는 것이 막막할 때가 있다. 젊은 시간 언저리의 어디쯤일 수도 있고, 나이든 언젠가일 수도 있다. 막막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때, 막막함은 배가된다.
어쩌면 막막함이란 발견되는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가수분열를 일으키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핵분열처럼..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고도의 압력과 열로
폭발하며 파괴적인 힘을 과시하는 그것처럼 말이다.
20대의 사랑과 시간과 일은 늘 막막함을 전제로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게임의 튜토리얼처럼 이런저런 간섭과 옹색하기 짝이없는 아이템으로 무장(?)한다.
튜토리얼은 보통 skip한다. 직접 부딪혀 잃고 부서지고 죽어봐야 이해할 수 있고 강력해진다. 강력해지지 못한다해도 최소한 할만한가 아닌가에 대한 깜냥이
생기는 것이다.
너구리의 막막함은 (p48~50) 도저히 수습이 안된다. 강력한 막막함의 분열기이다.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참치에게 유일한 무엇이 되고 싶은 너구리, 하지만 어떤 표정도 보여주지 않는 참치. 그 속에서 막막한 사랑은 이어진다.
성장통일 수도 연애질일 수도 있는​ 이 소설에서 비슷한 시절의 비슷했던 사람 하나가 스쳐간다.
-우리 사막에 가지 않을래?
-사막? 떠날 준비가 안됐어.
-준비따윈 필요없는데..마음만 움직이면 다 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건데? 극한 체험 같은거야? 사막에 숨은 보물찾기?
-아니, 그저 같이 가자고 말하는거야.
-지금은 힘들어. 할 일도 있고..나는 떠날 수 없어.
-그래..괜찮아. 떠나는 건 내 몫이니까.
-잘 다녀와.
-잘 가..라고 해야하는거야. 올지 안올지 모르니까.
-그래. 잘 가..
타클라마칸으로 떠난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직도 어딘가를 헤매고 다닌다는 소식도 있고, 먼 이국의 여인과 살림을 차렸다고도 했다.
거기에 묻혔다는 이야기에 막막함을 견뎌내야 했다. 사하라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막막했다. 이국의 여인과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막막함은
분열을 멈추고 기어이 폭발했다. ​타워크레인 위에서의 입맞춤과 폐선박 위에서의 노숙까지 그렇게 둘이 기대어 있을 때 막막함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예의의 다른
표현이었다. 서로에게 의미가 될 뿐, 그 어떤 부담과 짐도 되어선 안된다는 암묵적 약속..그 약속의 댓가로 만나게 된 막막함을 견뎌내야 했다.
우린 너무 어렸고, 세상이 재미없었으며- 재미없었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차라리 위로가 될 정도로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될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었다.
내 친구를 나는 <낙타>라고 했다. 때론 <라마>라고도 했다. 우린 타클라마칸과 히말라야에 한동안 미쳐있었으니까.
​막막함은 극복되는 것도, 스스로 소멸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뜨거운 폭발을 한번쯤 거쳐야 하는 젊음의 핵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분명한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 4. 그러므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갔다. 그게 지나갈 것이었든 지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든 간에. 우리는 모두 떠돌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머물고 지나가기를 멈추기 않을 것이다.
참치와 나는 서로에게 잠시 머물렀고 이제 지나갈 것이다. 지나갈 것이든 지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든 간에.
(....)
 밝은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선명했다. 반짝거리는 먼지 사이사이로 분홍빛 알갤이가 떠다녔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멈춘 듯이. 곧 멈출 듯이.
 너도 이렇게 보여? 아주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아.
 뭔가 평화로워.
 참치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평화롭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여기에.
(p143~144)
결국, 같은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 시간 밖에서 느껴지는 시간은 급하고 격하겠지만, 시간 속에서 시간은 어쩌면 더디고 느린 것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무중력상태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던져넣을 용기와 젊음, 혹은 여분의 시간이 있다면..이 나른하고 게으를 수 밖에 없는 막막한 무중력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단 한번도 막막해 본 적도, 좌절해 본 적도, ​무언가를 잃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하는 수 없지만, 무엇이라도 하나쯤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분홍색 알사탕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볼만 하겠다.
유난히 분홍색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흑백의 피사체들 속에 붉은 입술만 도드라지게 채색되어지는 어떤 포스터가 떠오르기도 한다.
서걱이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달콤한 분홍 사탕이 자꾸 눈에 박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5. 뜬금없지만..
이런 시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떤 나무의 말 /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결국..내 삶의 한 부분을 게워내 살피게 한 작품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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