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 길
 
용산..우리 엄마는 "용산구 갈월동"으로 시작하는 호적을 갖고 계셨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아버지는 "용산구 만리동2가"로 시작하는 호적의 호주셨다. 6대독자 귀한 아들..
그 귀한 아들을 품은 꼬장꼬장했던 할머니는 갈월동처자를 참으로 깐깐하게 다루셨다고 들었다. 나름 인텔리 신여성이라 자부하던 엄마는 단지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 자존심을 지켜냈다고, 오랜 시간을 머금은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지나치게 산문적이다.
 
이 거리를 걷는 건 무진무진 쌓인 내 시간 뿐 아니라 엄마의 시간, 아버지의 시간, 그리고 할머니의 시간 마저 쉴 새없이 파고든다.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는 "후암동 이모"라고 불리는 분이셨다. 이모는 늘 색이 곱고 너무 달아서 머리가 띵한 사탕이며 카라멜을 핸드백에 넣어오셨고, 엄마는 기꺼이 그 사탕과 카라멜을 사곤 하셨다. 내 또래의 아들과 둘이 사는 그 이모는 그렇게 피붙이마냥 왕래를 하곤 했다. 이모에게선 고소한 치즈냄새가 났고, 이모의 가방에선 언제나 made in U.S.A가 찍힌 화장품과 과자들이 풀려나곤 했다. 노란색, 하얀색, 초록색의 껌들..이모는 공주님인지도 몰랐다. 그 때, 이모에게 화장품을 샀던 중국집 아줌마는 이모를 "양공주"라고 불렀던것도 같다.
후암동 이모집은 작고 어두웠고, 구석구석 아직 뜯지 않은 낯선 언어로 도배된 물건들이 늘 그득했다. A,B,C,D..영어 타자수였던 엄마 덕에 얻어 배운 알파벳이라도 짚어내면 이모는 박수도 쳐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셨다. 그렇게 엄마의 통장과 함께 사라지기 전까진 말이다.
 
이슬람 사원을 끼고 걸어올라가다 보면 버스 종점을 지나서 더 올라가다보면 작은 교회가 있었다. 사람에게 지친 엄마가 아는 이 하나 없는 교회를 일부러 찾고, 일요일마다 숨이 턱에 차도록 꾸역꾸역 올라가 기도인지 통곡인지 모를 것을 쏟아놓고 말간 얼굴로 되짚어 오는길..그렇게 오는 길에 엄마는 시장에서 커다란 핫도그를 사주시곤했다.
그 핫도그 하나를 위해 영악한 나는 짐짓 신앙심이 별나게 깊은 아이의 얼굴을 하곤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내렸다. 그리고 졸지 않고 예배를 마친 날이면 예쁜 머리핀 하나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곳엔 아버지의 엄마, 꼬장꼬장했던 만리동 할머니가 이사한 집이 근처에 있었다. 사연많은 가족사에 내쳐지다시피 한 엄마가 그렇게라도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자 했음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고등학교때 빵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원효로에 빵집을 내셨었다. "뉴욕제과" 아파트 단지 앞의 빵집은 제법 장사가 잘 되었지만, 바로 옆에 패스트푸드점이 생기면서 오래지 않아 문을 닫았었다. 원효로를 빠져나와 마포대교까지..강변을 따라 넋 놓고 걸었던 기억이 오롯하다. 멀리 당인리의 굴뚝은 바람의 방향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엄마이 빵집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던 것처럼..
 
 
# 2. 이 책
 



 
표지를 펼치니 용산이 오롯이 들어앉았다. 지도를 따라 손끝으로 훑어본다. 기억도 가물가물했던 이야기들이 어쩌면 지난 밤 유쾌했던 꿈마냥 떠오르기 시작한다.
후암동 길을 뛰어가던 갈래머리의 여자애, 갈월동에서 만리동으로 시집 왔던 어여쁜 새댁, 핫도그를 손에 들고 찬송가를 흥얼거리던 영악한 표정의 계집애..
참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진을 살피고 글을 읽는다.
노란 사진들이 용산을 닮았다.
책갈피에서 오래 마른 은행잎처럼, 어느 날 문득 발견했을 때 우수수 이야기와 풍경이 떠오르듯이..그렇게 은행잎을 닮은 노란 사진들이 빼곡하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발길을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눈이 지나는 자리마다 눈동자를 닮은 자욱이 발자국 옆에 생길지도 모를일이다.
책에서는 아버지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작고 여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혹은 번쩍 들어 목마를 태우시고, "여기가 만리동고개야. 밑에 봐봐. 멋지지?" 하던 그 아버지의 숨소리와 끈적하게 흐르던 땀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 3. 저마다의 길
 
모든 길은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이 자취다. 아무도 걷지 않은 곳은 길이 되지 못한다.
무게도 보폭도 다른 사람들이 무게도 보폭도 다른 삶을 살다간 증표, 수없이 많은 시간들이 다져놓은 골목, 끝끝내 비밀을 지켜낸 담장과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길이다.
짧고 강렬한 책 한 권을 손에 들고..내가 두고 온 시간을 만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묻는다.
지극히 산문적인 거리여서 다행이다.
가늘게 눈을 뜨고 천천히 누군가에게 일러주며 걸어도 부끄럽지 않을테니 말이다.
 
같이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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