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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익숙한 내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흥미로웠다. 야만적? 바바리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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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p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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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소년 앨리시어. 그는 부랑자이다. 그것도 여장 부랑자이다. 어쩌다 부랑자가 되었을까?
그것도 여장을 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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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p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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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시어는 고모리에서 나고 자랐다. 동생과 새엄마와 그의 늙은 아버지와 개들..그리고 가여운 친구 고미와 함께..
옛날 옛적 굶주리던 마을 사람들이 먹어선 안될 것을 먹었다는 무덤 세 개가 있는 곳.
앨리시어의 일상이 그려진다.
글을 읽어 내리며 나는 자꾸만 말도로르의 노래가 떠오른다. 그 가학적이고 폭력적이던 글이 말이다.
작가 역시 상처를 통째로 드러내며 이야기 한다. 때론 반복적으로 때론 적나라하게 때론 "이걸 어떻게 포장하냐구?
이 상처를 보고도 그런말이 나와?" 다그치듯 직설적인 표현을 노래처럼 불러댄다.
"자 쉴탕 Sultan이여, 방바닥을 더럽히는 이 피를 그대의 혀로 내게서 없애다오. 붕대를 매는 것은 끝났다. 피가 마른 나의 이마는 소금물로 씻겨졌다. 나는 나의 얼굴에다 작은 끈을 십자로 엮어 묶었다. 결과는 끝없이 계속되지 않는다. 즉 피로 가득 물든 네 개의 속옷과 두 개의 손수건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엔 누구도 말도로르 Maldror가 그의 동맥 속에 그렇게 많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 위에서는 단지 시체 같은 반사광만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마도 이것은 그의 몸을 채울 수 있는 거의 모든 피였으며, 더 이상 그의 몸 속에는 피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충분하다. 됐어, 탐욕스런 개야. 바닥을 그냥 그대로 놔 두어라. 너는 배가 가득 찼다. 계속 마셔서는 안 된다. 곧 토할 것이기에. 너는 적당히 포식하였다. 너의 누추한 집으로 가서 자거라. 네가 행복 속에서 헤엄친다고 생각하라. 왜냐하면 엄숙하게 눈에 보이도록 만족스럽게, 네가 너의 목구멍 속으로 내려보낸 혈구 덕분에, 삼 일 동안을 너는 배고픔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 레망 L'eman이여, 비를 들어라. 나 역시 비를...... 들려 한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구나. 너는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눈물 상자에다 너의 눈물을 담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미 지나간 시간인 밤에, 나로서는 이미 잃어버린 고통이 만들어 내는 커다란 발자국을 네가 냉정하게 응시할 용기가 없다고 나는 믿을 것이다. 너는 샘물로 두 개의 물통을 찾으러 갈 것이다. 마루가 닦여지면, 너는 이 속옷들을 옆방에 놓을 것이다. 세탁녀가 항상 와야 하는 그대로, 오늘 저녁 돌아오면, 너는 그것들을 그녀에게 맡기리라. 그러나 한 시간 전부터 비가 많이 오고 있고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으므로, 그녀가 그녀의 집에서 나오리라고 생각되지 않는구나 - 말도로르의 노래 2 중에서. "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앨리시어와 동생, 그리고 고미는 방치된다.
새 어머니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작가의 말은 생생하다. 너무도 생생해서 이 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는 동의를 하게 된다.
"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가속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이 그 씨발됨에 노출된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도 고모리의 이웃들도 그것을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고 싶어하고 모르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모른다."(p40)
씨발됨!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어쩌면 요즘 아이들이 숨쉬듯 뱉어대는 익숙한 이 말이, 그저 천박함의 표현이거나, 쎄보이려 하는 것이거나
또래에게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 즉 씨발됨을 표출하는 세상과 기성세대들
에게 퍼부어지는 소리는 아니겠는가..
앨리시어와 동생의 대화는 커다란 노래다.
둘이 주고받는 듀엣. 어느 한쪽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것은 그대로 그들의 노래이고 꿈이다.
네꼬의 이야기, 갤럭시 이야기, 복숭아술이 유명한 마을이 이야기..
앨리시어는 그녀의 폭력과 맞서고자 한다.
" 그녀 역시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같은 것을 느끼는 거고, 그것은 곧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 다는 뜻이 될것이다.
앨리시어에게 그녀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어떤 것, 말하자면 씨발. 그녀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앨리시어는 그때 알아차린다.
그녀에게 앨리시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어떤 것, 말하자면 씨발. 감각하고 반응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상상하기가 싫은 것,
그녀는 곧 얼굴을 찡그리며 공격해올 것이다. 그때 앨리시어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p125)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내일은 어제와 같지만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세계의 귀퉁이가 약간 뒤집혔고 점차로 더 뒤집힐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제 그것을 안다.
밤이 마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작정으로 누웠다가 도로 일어난다. 이 방엔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방이 낯설다. 혼자뿐이다.
이 방에 혼자 있다.
동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p149-150)
사고 현장에서 사체로 발견되는 동생. 그 죽음은 폭력에 의한 것일 수도, 앨리시어를 찾아나선 길에 만난 사고일 수도 있다.
앨리시어는 그곳에서 걸어나온다. 마치 알을 깨고 나와 아프락삭스에게 날아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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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앨리시어의 냄새, 앨리시어의 복장, 앨리시어의 궤적 모두, 언제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할까.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 애리시어도 그의 이야기도 결국은 다른 모든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할까.
앨리시어도 그대처럼 이거리 어딘가에서 꿈을 꾼다. (p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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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처럼 시작되었던 앨리시어의 존재이유와 같은 형태로 결말이 지어진다. 그러나 사뭇 다르다.
불쾌한 앨리시어의 이야기는 나처럼 꿈꾸는 이거리 어느 존재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가 보려하지 않고, 알려하지 않아서 알아지지
않았던 이야기. 모르고 싶어했기에 몰라졌던 이야기. 그 한가운데 그 어미의 모습으로 거리를 떠도는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가 있다.
162쪽의 길지 않은 장편.
입체적인 서사시를 하나 읽어낸 것 같은, 화면이 멋졌던 단편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오래도록 잔영이 남는다.
미처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듯, 지난 번에도 틀리고 이번에도 틀렸던 문제의 오답정리를 하듯 책을 짚어가며 읽는다.
흥얼흥얼 거리며 읽는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