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고독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회갈색의 표지를 벗기면 연한 핑크빛의 표지를 만나게 되는 책이다.

슬픔의 색 밑에 감추어진 애틋한 색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알리체와 마티아, 제 속에 상처를 품은 두 청춘의 세상과 호흡하기, 혹은 고독과 화해하기.

 

#1. 소수.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자연수를 가르친다. 정수의 개념과 유리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친숙하게 보았던 자연수를 가르치는 것이다.

-자연수는 뭐지?

-일,이,삼,사, 오,육,칠,팔....

아이들은 큰소리로 교실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하나라도 더 대답하려고 얼굴이 빨개지고 목엔 굵은 핏줄이 보일만큼 큰 소리로..

-그래, 그게 자연수야. 그런데 이 자연수도 몇가지로 나누어지지. 어떤 기준에 따라? 약수의 갯수에 따라 나뉘게 된다.

약수가 하나인 1, 약수가 두개뿐인 수, 즉 1과 자기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 소수, 그리고 세개 이상의 약수를 갖는 합성수로 나눌 수 있어.

-왜요? 왜? 왜 나눠요? 그냥 자연수해요. 자연~스럽게~!

-글쎄 왜 나눌까? 그냥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놔둘일이지. 쨌든, 자연수는 이렇게 세분할 수 있어.

자, 그럼 하나만 묻자. 자연수는 소수와 합성수로 나뉜다. 맞나?

-네~!

-아니, 틀렸어. 1을 빼먹었잖아. 자연수는 1과 소수와 합성수라고 했지? 다시 묻자.

모든 소수는 홀수다. 맞나?

-네? 아닌가?

-틀렸어. 2가 있잖아. 가장 작은 소수 2. 2는 짝수지?

-아..헷갈려요.

소수를 걸러내는 건 다소 귀찮은 일이다. 고대 에라토스테네스는 1 빼고, 2의 배수 지우고, 3의 배수 지우고, 4의 배수 지우고...이런 식의

과정을 통해 소수를 골라냈다. 이것을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라고 부르기도 한다. 굳이 소수를 분류하는 이유.

소인수분해를 하기 위해서다.

소인수분해는 어떤 자연수를 소수의 곱셈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구성성분을 밝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인수분해를 통해 어떤 수가 가지고 있는 약수의 갯수까지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수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 , 더 이상 쪼개어 지지 않는 수에 이르러 그것들의 곱으로 나타내는 방식.

어쩌면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 제 삶의 제일 작은 단위와 마주하게 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내 삶은 아주 흔한 100이야. 라고 말해버리지만, 실은 2의 제곱과 5의 제곱으로 이루어졌으며,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도 가지고 있을 소수인 인수,

즉 소인수 2,와 5를 품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는건 아닐까?

 

세상을 보게 될 시점에 내가 품었던 나의 고유 숫자, 기본 숫자, 바탕이 되는 숫자, 오직 1과 "자기자신"일 때만 분해를 허락하는 숫자 "소수"를

나는 기억하고 있는가?

 

#2. 알리체.

스키를 강요하는 아버지, 그것을 벗어날 길은 없다. 자꾸만 뒷걸음질 치게 되는 알리체에게 닥친 사고. 덕분에 더 이상 스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불편한 몸과, 상처입은 마음이 거부하는 거식의 습관만 뺀다면 어느 정도는 타협할 수 있는 삶 아닌가?

 

"그녀는 어떤 행동을 하든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늘 확고해 보여야 한다는게 끔찍했다. 알리체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결과의 무게'라고 불렀다.(...) 열다섯 살다운 생기발랄함을 원했지만 그것을 손에 넣으려 애쓰는 사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달아나고 있다는 데 생생한 분노가 일었다. 결과의 무게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녀의 생각들은 점점 더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그녀를 조여왔다.(p119-110)"

 

"그녀는 이 몸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면 파괴할 수도 있고, 흔적이 남을 정도로 망가뜨릴 수도 있고,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꺾었다가 땅바닥에 버려 시들어가는 꽃처럼 비쩍 마르게 내팽개쳐둘 수도 있다고..(p142)"

 

비올라의 파티에서 마티아를 만나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결과의 무게에 짓눌려 빛나는 시간 밖으로 밀려나가거나 혹은 스스로 뒷걸음질치며 걸어나온 알리체의 시간과 고독은 회갈색의 낡은 테이블보 같았을까?

 

내 다리엔 작은 화상자욱이 남아있다. 아마 알리체가 갖고 있는 걸음걸이의 원인과 닮았을까?

잦은 전학으로 나의 어린 시간은 늘 낯선 것들과 마주서야 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갈 즈음에 또다시 전학을 가게 되고, 6년의 초등학교 기간동안 나는 여덟번의 전학을 다니게 되었다. 생활기록부에는 더 이상 학교 이름을 적을 공간이 없어 덧댄 종이가 달려있었다.

끔찍한 가난은 한 곳에 머물러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이곳, 저곳을 전전하게 되었었다.

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훑어내리는 아이들의 시선이 싫었다. 익숙해지는 것도, 친해지는 것도 싫었다. 친해진다는 건 떠나게 될 시점에서 아주 귀찮은 조건이 되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큰거리는 콧등이랄까, 조절되지 않는 눈물따위가 말이다.

어느 날, 엄마는 조심스레 이사 이야기를 하셨다.

이번 학교에서는 전학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있었던게다. 끔찍하게도 말이다.

다음 날, 언제나처럼 혼자 챙겨먹는 저녁. 석유 곤로 위에 끓고 있던 냄비를 맨 손으로 들었고, 곧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에 쏟고 말았다.

이웃의 아주머니가 달려오시고 소주를 붓고 물을 붓고, 젖은 바지를 벗겨내는 동안, 화기에 뜨거움보다 잠깐이라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더 컸다.

전화를 받고 엄마가 달려오실 즈음, 나는 인근의 병원에서 두 다리 모두 붕대를 감고 누워있어야 했다. 수포가 일어나고 상처가 깊어질 수도 있다고

침대에 붙어 있던 "절대안정, 이동금지"의 표지는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여덟번째 학교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치마를 입지 않는 여자아이로 자라났다.

교복 치마 밑으로 드러나는 화상자욱이 너무나 선명했으니 말이다.

말수가 적고 혼자 생각하고 읽고 무언가 자꾸만 끄적이게 된 것도 그 때 이후이리라.

 

알리체의 상처, 혹은 나의 상처, 저마다의 결과의 무게일게다.

 

#3. 마티아.

쌍둥이 남매 미켈라와 마티아. 모든 것에서 부족하고 놀림거리였던 미켈라와 뛰어난 마티아. 미켈라때문에 자꾸만 위축되는 마티아는 친구의 생일 초대를 받던 날, 공원에 미켈라를 두고 간다. 잠깐 다녀오겠노라는 말과 함께,

천진한 표정의 미켈라. 결국 돌아온 마티아는 미켈라를 찾아내지 못한다. 잃어버린 쌍둥이 반쪽.

그 죄책감이 마티아로 하여금 자꾸만 자해를 하게 한다. 상처가 쌓이고 쌓여 감각조차 모호해진 마티아의 손, 마티아에게 상처는 미켈라이다.

알리체를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어 진다.

수학적으로 탁월한 마티아.

 

"2760889966649 그는 뚜껑을 다시 닫고 펜을 종이 옆에 내려 놓았다. '이조 칠천육백팔억 팔천구백구십육만 육천육백사십구' 그는 큰 소리로 그 수를 읽었다. 혀가 꼬일 만큼 복잡한 문장을 입에 완벽하게 익히려는 것처럼 한 번 더 작게 중얼거렸다. 마티아는 그 수를 자기 것으로 정했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어느 누구도 그 수를 생각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마 그 순간까지 그 수를 종이에 적어본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소리내어 읽은 이는 더더군다나 없었을 것이다.(...)  2760889966651 이라고 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알리체거야. (...)

이 두 개도 쌍둥이 소수일지 몰라. 마티아는 생각했다. (p176)"

분석하고 증명하고 계산하는 것으로 명확해지는 것을 원하는 마티아. 그에게 알리체는 증명되지 않는 명제였을 것이다.

마티아 자신이 소수라는 전제하에 출발했으므로 알리체는 알리체로만 존재하고, 알리체로만 분해 가능한 소수여야 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 조차 마음을 열지 못하는 마티아의 상처와 고독은 어느 것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 매듭을 풀어낼 수 밖에 없다. 마티아 자신이 소수이니 말이다.

 

#4.모든 소수의 제곱은 세개의 약수를 갖는다.

같은 수를 두번 곱하는 것을 제곱이라고 한다. 제곱수가 되면 처음의 수보다 훨씬 많은 약수를 갖게 된다.

하지만 고집불통 소수의 제곱수는 단 하나의 약수를 늘리는 것으로 약수의 갯수를 한정짓고 만다. 똑같은 소수를 두번 곱해보아야 하나의 약수만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 성분을 늘려가는 것으로부터 고독으로부터 걸어나오는 한 걸음이 시작된다는 듯이, 조금씩 늘어나 주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소수로 태어났을게다. 오로지 자기자신으로만 대변되어지고 증명되어지고 명제화 되어지는..

그러나 조금씩 곱해지고 채워지는 커다란 숫자로 살아내는 건 아닐까? 그 시작에 "나"라는 소수를 품은 삶의 숫자는 조용히 불어나고 있을것이다.

자신의 수가 무엇인지 잊지만 않는다면, 제 속에 품은 고독의 온도가 어떤건지 안다면, 제 상처가 얼마나 단단한건지를 안다면 세상을 살아낸다는건 절반의 증명을 마친 수식일지도 모를일이다.

 

 

소수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소수는 모든 수가 그렇듯 두 개의 수 사이에서 짓눌린 채, 무한히 연속하는 자연수 안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다른 수도다 한 발 더 앞서 있다.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p173)

 

#5. etc

살아간다는 건, 상처를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헐벗은 채 나온 세상에 부딪히며 살아낸다는 건 무수한 싸움과 경쟁, 그리고 사랑이라 불리우는 간사한 혀에 속지 않도록 단단히 무장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나를 흔드는 가장 강력한 힘인 절제되지 않는 감정과 감상, 무시무시한 관념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단해져야했다. 단단해 지는데는 상처를 입는 것 만한 것이 없었다. 상처가 난 자리는 언제나 단단했다. 다른 어떤 곳보다 무뎠으며 다시 상처입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와의 싸움은 늘 그렇게 치명적이며 극단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라는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저주인지를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끝없는 고독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다 비명을 지르라는 저주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이길 이유는 없다. 언젠가도 그랬다시피 세상과 싸움에서 가장 든든한 내편은 "나"다. 나와 싸우지 말자.

마티아에게,혹은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

{수학의 본질은 자유로움에 있다 (Cantor.G 1845~1918}고 말한 칸토어의 명제는 기억할 만 하다는것.

내가 수학에 빠져드는 것 또한 자유롭고 싶어한 욕구였을지도 모를거라는 고백.

한 없는 거듭제곱으로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주인이고 싶다는 외침은 아니었을까?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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