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론강
이인휘 지음 / 목선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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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을 읽었을 때,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이인휘. 하지만 이내 잊었다. 

늘 그렇듯 작가의 이름은 작품의 잔상과 여운, 야박하게 남는 의미들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파란 표지의 폐허를 보다를 읽었다. 그 때 이런 감상을 적었었다.

< 누가 그랬다. 더이상 '노동문학은 없다. 문학노동만이 남았다'라고 말이다. 현장으로 들어간 작가보다 작가의 책상으로 올라간 노동이 더 많았다. 현실이 아닌 환상, 꿈, 막연함. 이런 것들이 담아내는 노동의 의미는 뒷맛이 썼다. 어쨌든 가검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 사이에 제대로 벼린 날 선 진검을 든 검객이 나타났다> 라고.

그리고 작가의 이름을 살폈다. 이인휘.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당시 세간에서는 어떤 연예인의 부인이었던 이인휘라는 사람의 프로필이 뜨고 그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김남주를 검색했더니 연예인과 화장품 목록이 좌르륵 떴던..

작가는 내 생의 적들 이후 오랜만에(내 생각일 뿐이지만..)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 후로 착실하게(?) 작품이 나왔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건너간다.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 줘 . 그리고 부론강. 

폐허를 보다와 노동자의 이름으로 건너간다를 나는 노동3부작이라고 칭한다.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샅샅이 파헤치며 적어낸 글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솔직했다.

2016년 폐허를 보다 부터 2020년 현재까지 다섯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자본과 싸우는 처절함. 나의 청년기와 맞물리는 투쟁의 역사는 생각보다 생생하게 파고들었다. 작중 인물이 아니라 내가 아는 선배, 후배, 전해들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생했다. 조금씩 타협해가는 지도부들의 이야기, 동지들을 두고 뒤돌아서야 했던 사람의 심정, 그러나 끝내 놓을 수 없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는 너무나 아팠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둘째치고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전제되야 사람답게 살아내려는 의지와 요구가 나올테니 말이다. 자본의 세계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건 그저 소모품으로 산다는 것은 아닐까. 소모품이 아닌 주체로 살아내려는 의지는 언제쯤 강건하게 나를 뚫고 나올까를 수없이 되묻는다.

책 세 권을 읽고 나는 많이 물었다. 내 삶을 관통하는 '정의'는, '노동'의 가치는 '사람'의 의미는 얼마나 단단한가하고 말이다.


그 후 만난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줘.는 사실 의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인휘는 노동자의 이야기만 쓸 것 같아서..

산하와 정서의 이야기는 표지만큼 푸르렀다. 환경의 문제와 자본들이 자연을 어떻게 잠식해들어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발랄(?)하게 써내려갔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험한 길을 기꺼이 디뎌온 사람들의 상처를 하나씩 짚어갔던 이야기라면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줘는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아니 어떻게해야 상처를 줄일까에 대한 고민이보였다. 단지 노동의 문제뿐 아니라 각계층별 지역별로 연대하고 함께 지켜내야 할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출간된 작가 이인휘의 부론강.

두 남녀가 마주한 표지가 낯설지만 궁금했다. 부론에 산다는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찬미와 원우를 중심으로 부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상처를 지닌, 그것이 사람에 대한 상처이건 시대의 상처이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고, 그들이 건너 온 시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다. 박상화 시인의 시집 '동태'를 비롯해 사이사이에 적힌 시들과 재주 많은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강물에 뛰어든 달빛처럼 일렁거리는 것이 나름 이쁘다.

386이라고 불렸었고, 486이라고 칭해지다 586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아 온 시간들과 많이 겹친다.

주변에서 원우처럼 찬미처럼 차라리 떠나거나 차라리 숨어버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보았고 그들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끌어않은 채 평생을 자책과 회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유명짜한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진심으로 연대하고 용맹하게 싸우고 헌신적으로 투신했던 사람들이 실망하고 때론 내쳐지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386이 어쨌고 저쨌다며 욕을 할 때는 마치 자신이 잘못인양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들이붓는 이들도 많았다. 누가 저들을 욕할것인가. 

어디에서도 속시원하게 터놓지 못할 이야기들, 어디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들, 어떻게 해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생기고 그냥 아픈대로 내버려두겠다던 상처가 나아가고 다른 사람의 상처가 보이고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 살아가는 이야기가 '부론강'이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사람 인(人)자는 서로에게 기대어 완성되는 글자라고 했다. 이제야 저들은 '사람으로 사는 법'을 깨우친 것일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기술되는 부론의 사적들과 문화재, 나무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우리 동네를 잘 아나? 라고 혼자 생각하고 웃었다. 뭐 별로 아는게 없다. 있다고 해도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 이상의 것은 아니다. 작가를 통해 듣는 부론의 풍경은 단아하고 묵직하다. '부론'이라는 지명마저 생소한 사람조차도 한 번 가볼까? 싶게 만든다. 

부론강은 작가의 이전 저적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힘이 빠졌다기보다 눈이 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것 같다. 


'강물은 빗방울 하나하나의 여정을 개의치 않고 무심하게 흘러갔다. 인간의 생이 빗방울 같았다. 한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자신의 생이 떠밀려 온 것처럼 강물은 하나의 빗방울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조차 없었다.(p150)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강물도 알고 있을거다. 그 거대한 흐름을 만든 건 빗방울이었다는 걸..

빗방울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 부론강이다. 


내게는 파란만장했던 2020년.

부론강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도닥여주는 듬직한 손길을 만난것 같다.

조심성 없이 강물에 떨어진 잎새처럼 일렁이며 떠내려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꼭 부론강이 아니어도.


사람들 사이엔 날마다 깊어지는 강이 흐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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