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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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이형을 처음 읽은 건 2014년 이었다. 쿤의 여행. 글을 읽으며 내내 흥분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조합하고 있다는 느낌.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촘촘하게 의미를 박아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기회가 될 때마다 윤이형의 작품을 읽었다.

우퍼스피커 같은 작가라고 나는 평가했다. 묵직하게 소리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존재까지 공명하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라고..차이라면 우웅~울림 뒤에 오는 날카로움일거다.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 꺼낸 날. 이상문학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고 급기야 작가의 절필선언(?)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마지막 작품인셈인가?

오늘, 문학사상사측에서 올린 사과문을 읽었다.

다만 문학사상사의 문제일까? 라고 의문을 품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의문은 늘 뒷맛이 썼다.

어쨌든 붕대감기를 읽었다. 작가가 세영이처럼 한바퀴 더 돌리는 바람에 '악'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심한 압박감을 받으면서..

그러나 뿌리치진 못했다.

 

2. 헤어디자이너 해미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기가막힌다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율아와 서균이, 두 꼬맹이를 빼고, 성추행 가해자인 천을 빼고 모두 열세명의 이야기가 레고조각처럼 맞물리며 쌓여간다,

책을 덮으며 아라크네를 생각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들을 그려낸 아테나와 붙어서(?)도 조금도 꿀리지 않았던 아라크네. 그녀의 천 위에 그려진 인간의 세밀한 삶의 모습은 신들의 권능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거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 패기.

속속들이 파헤쳐 들어간 이야기와 이야기 속 사람들을 이렇게 펼쳐놓다니..근래들어 읽은 책 중에 가장 진솔하고 가장 영민하며 가장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아라크네는 거미줄을 내려왔지만 결국 다시 거미줄을 짜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3.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뻔한 이야기라서 소름돋게 이해가 되고 저절로 그려지는 단점(?)이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대상화되지 않는다. 나는 진경이며 세연이고 지현이며 바람이고 해미면서 윤슬이거나 명옥과 효령같은 사람인 것이다. 어떤식으로든 교집합이 성립되는 이야기 속에서 투영되는 '나'를 보게 만드는 글의 힘이 대단했다.

단언컨대 이 이야기는 줄거리라고 장황하게 적어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빼도 안되니말이다. 물론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큰 조각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4. 아군도 적군도 모호해지는 페미니즘, 혹은 여성운동의 허와 실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부분이 좋았다. 전선이 수시로 바뀌고 신념과 아집사이를 넘나드는 그 위태로운 발걸음이 미덥지 못하다기보다 단단히 연대해 주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우정을 매개로 그려내는 상처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 그리고 서로에게 어깨를 대어주고 연습으로라도 서로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줄 친구가 되어주는 것의 의미를 본다.

그러고보니..나도 세연이 같은 친구가 있었네.

 

5. 책장을 덮으며 전화번호를 뒤적여본다.

문득..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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