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고독
강형 지음 / 난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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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지날 무렵. 습관적 우울과 절망에 잠식 당하던 시절. 살아있다는 것이 못견디게 힘겨울 때면 벽제 화장터에 갔었다. 무작정..시외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고,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벽제가 가까워지면 늘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한껏 타올랐던 연기들이 습습 내려앉곤 했다. 무언가 타는 냄새. 어쩌면 떠나는 사람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일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그저 나무가 타는 것과는 다른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미련의 냄새'라고 불렀다. 낮고 천천히 '잘가요'라고 인사도 했다. 그러고 나면 땅에 잘 붙어있는 내 발바닥이 대견했고 아직은 미련의 냄새를 남길만큼 삶에 남은 미련이 없다는 것이 억울해서 오기가 생겼다. 더 살아볼께. 이상한 다짐을 하게 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이 기괴한(?) 습관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나와 거리를 더 두거나 호기심으로 더 가까워지곤 했다.

어쩌면 철 없던 내가 원한 것은 '고독'이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자라서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던 때, 유적을 찾아서, 먹거리를 찾아서, 패션을 찾아서..등등의 주제들 속에 '묘지를 찾아서' 라면 꼭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유명인이 묻힌 묘지들을 가끔 TV에서 보았지만 그런 근사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아닌 황량하고 인적 드문 그런 곳을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술이 잔뜩 취했던 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흙투성이가 된 채 망우리 공동묘지 근처에서 눈을 뜬 일이 있었던 것을 친구들은 아직도 이야기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할 때마다 뭔가 조금씩 덧붙여져 이제는 거의 설화처럼 들릴 지경이지만..그 끝에 '얘가 아주 고독한 애였어 그치?'라고 붙여주는 건 여전했다.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딱 두가지였다.

작가도 출판사도 아니고 '고독'이라는 제목과 '묘지'라는 공간.

묘지관라인 피터와 묘지의 유령들의 이야기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작은 소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에 끼어든 유령의 이야기일수도 있고 유령의 시간에 발 들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살이있음과 이미 죽었음의 경계를 걷는 피터를 찾아 온 한 형사와 나눈 일주일간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힘이 제법이라고 느낀 것은 책을 다 읽어갈 무렵이었다. 음성지원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그런 경험. 늙은 피터의 음성으로 읽히는 책. 두껍지 않은 책을 빨리 읽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재미가 없어서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피터의 진술(?) 속도에 맞춰 읽어지는 것.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넘어갈 무렵엔 긴 한숨을 쉬게 되고 커피를, 물을 한 잔 마시게 되는 묘한 상황.

살아있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피터는 정말 고독했을까? 유령들과 이야기하며 피터는 고독하지 않았을까?

 

수정구슬에 갇힌 한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태자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굶기고 굶기다가 작은 통에 먹을 것을 넣어두고 아이를 유인하면 아이는 먹을 것에만 집중한다. 그것을 먹으려고 할 때 아이를 죽이면 아이는 자신이 죽는줄도 모르고 먹을 것에 대한 집착으로 통에 갇힌 귀신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한나가 수정구슬에 갇히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왜 아이여야 하는가. 순수한 집착 순전한 기다림 순결한 죽음이기에 아이여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태자귀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 갇혀버린 영혼이라는데 한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잔인한 일을 벌인 리즈는 자신의 딸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집착.

집착을 놓으면 주박이 풀리고 자유로워질텐데 끝끝내 놓지 못하는건 욕심인건가? 본성인건가?

 

생각이 묘지의 묘비만큼 많아졌다. 산 사람의 발소리가 잦아든 시간에 시작되는 유령의 시간을 가늠해본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라고 한 폴 틸리히의 말을 빌어온다.

어쩌면..?

그렇다면..?

피터는 충분히 '고독'했으리라..

외롭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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