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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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엔가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머리가 아프다. 일종의 저기압에 반응하는 신경이 있는 셈이다.

생각보다 이런 증세를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고 의사는 늘 만병통치같은 혹은 마스터키 같은 말을 했다 '신경성입니다'

그래도 처방을 해주시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면 진통제와 함께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내어준다.

그런 처방을 받고 돌아오면 '나는 왜 이따위로 생겨먹은거지?'하는 생각이 들고, 이 두통의 원인은 나 이며 결국 내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날도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책을 집어들었다. 하필 '이제야 언니에게'를.

작가는 섬세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섬세함은 가끔 방만함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영리한 작가는 충성스런 네비게이션처럼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이야기의 중심을 잘 잡고 간다.

희뿜하게 어떤 장면들이 겹쳐졌다. 삼촌이 자꾸 만진다는 얘기를 하던 경미. 아빠 친구가 술을 주었다던 은정이.

모두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다 키웠고 일찍 결혼한 경미는 곧 할머니가 된다고도 했다.

어리다고 하기에도 뭣하고 다 컸다고 하기에도 뭣한 경계의 시기에,'여자'의 삶이 준비되던 시기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추행을 당했던 이야기들은 제법 들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애매한..엄마한테 말했다가 오히려 호되게 혼난 이야기를 들었다.

니가 뭘 잘못했겠지. 그 사람이 괜히 그랬을리가 없어.

싸가지 없이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죽을 때까지 입도 뻥긋 하지마. 너는 결혼 안할꺼야?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넌 애가 왜 그러니? 조심성 없이.

이런 말들을 보통 듣고 와서 아이들은 엉엉 울거나 엄마가 계모가 틀림없다는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숨어서 욕을 했고, 숨어서 저주했다.

제야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게 꽁꽁 싸매 봉인 해 두었던 '너 이 얘기 죽을 때까지 비밀 지켜야 해'라며 입을 열던 친구의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 친구는 결국 '여성'도 '엄마'도 되지 못하고 여고생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가해자가 보호받는,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아직도.

 

어른스럽고 모범적으로 보이는 제야를 따라 온 당숙.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는 제야가 성폭행을 당해도 싸다는 이유가 된다.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된 모 가수의 성폭행 사건에 직업여성인데 성폭행이 가당키나 하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실소가 나왔다. 어떤 취향을 가졌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이 성폭행을 당해도 할 말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여자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갖고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하는 자들이 이상한 것이고 이것은 순간적 충동이나 그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범죄인 것이다.

전형적인 그루밍을 실행한 당숙, 그 그루밍을 받아들이지 않은 제야. 세상은 성공한 남자인 당숙의 편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얌전한 줄 알았더니 발랑까진 제야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 제야의 이야기를 읽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너무나 선명하고 너무나 참담해서..

 

책을 읽는 동안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것을 잊었다. 머리 말고 다른 곳이, 온 몸이 아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온 몸에서 통증이 감각됐다. 기억이었을까? 책이었을까? 통증의 원인은...

 

 

책을 다 읽고도 한 동안 책 속의 장면들이 오롯이 남아 힘에 부쳤다.

이제야 뭐라도 한 글자 남길만큼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가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너무나 잘 그려낸 작품. 감정에 호소하는 오로지 피해뿐인 글이 아닌 제야에게 이입할 수 밖에 없는 글의 힘이 좋았다.

상처는 결국 낫겠지만 흉터는 평생 고통을 저장하고 있을거다. 그 흉터가 생긴 싯점, 상황, 사람들..그 모든것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고통도 끌고 올 것이다.

누구라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제야 제야에게 말해 줄 수 있겠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피해자들에게. . .당신의 고통은 신경성이 아니예요. 그것은 피해의 흔적이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라고 말해야겠다.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문제 그 시선의 문제 확대되는 가해와 자신이 가해자인지 모르는 가해자들의 범람을 인정해야 한다.

 

제야는..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아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더 나은 선택이란 없다. 지옥뿐이고, 지옥 뿐이라면 당숙도 지옥에 있어야 한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그런 일을 겪었다 쳐도, 그래도 너는 잘못이 있다. 그렇게 자랑하듯 떠벌리면서 벌을 주겠다고 그러는 것도 정상적이지는 않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너도 부끄럽고, 우리도...
우리가 다 부끄럽다. 감추고 쉬쉬해도 모자를 판에 이게 재판을 받겠다고 나설 일이냐. 대체.
당숙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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