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독서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 아무리 젠체해도, 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그렇다.
내 싸움이 육사나 단재만 하랴. 내 가난이 서해만 하랴. 내결핵이 유정만 하랴. 죽음을 희롱했기로서니 이상만 하랴.
그들은 봉건과 식민의 이중 굴레에서 벗어나려 고투했고,
그와 동시에 제 이름을 걸고 글을 썼다. 남의 것이 아닌 제나라 제 민족 고유의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의무감도 상당했을 텐데, 어쨌든 쓰고 또 썼다. 

여기서는 그저 작가로서 그들이 꾸려 가던 인생의 어느 한 장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밉든 곱든 그것이 그들을 새삼 기억하게 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인생 사진‘ 한 컷이기를 바라면서.

 일단봉천(펑톈, 현재의 선양)행 기차를 타고 돈이 자라는 데까지간 다음, 걸어서 베이징까지, 거기서 다시 중국 남방을 거쳐안남(베트남), 면전(버마), 섬라(타이)를 지나고, 인도를 두루 돌아 파사(페르시아)와 소아시아로, 그리고 구라파(유럽)보다는 아프리카로 방향을 틀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와애급(이집트)을 보고 대륙을 종단하여 희망봉까지 내려가는것. 도대체가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일주 프로젝트‘의 동기에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기서 쇠망한 민족들의 정경도 보고, 또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독립을 도모하는가 보고 싶었다. 그 속에서 내가 나갈 길이 찾아질 것 같았음이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일종의 허세이거나 구차한 변명이었다. 

그는 아버지보다 거의 스무 살이나 어린 어머니가 입에다가 아주까리기름을 한입 물어서 아버지의 항문에 대고 불어 넣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런 정성으로도 무너지는 집안의 기둥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없었다. 그때부터 소년 이보경(이광수의 아명)에게 생이란 오직 목구멍을 위한 처절한 비루의 연속일 뿐이었다.

‘ 이런 처지에서 그의 망명 동기는 말이 좋아 세계일주였지, 정확히는 생에 대한 환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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