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는 그 모든 가능성을 지닌 아이를 잃었다.
질서와 명분을 잃었다. 선하고 바르려는 의지를잃었다. 이석도 아이를 잃었다. 삶을 다 바쳐 살리려던 아이를 잃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병원은 차라리 거대한 장례식장이었다. 가족을 잃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는 곳이었다. 사무장 말이맞았다. 병원에서는 누군가 죽기 마련이었다.

 비밀을 알고 있다고 느낄때에는 비리를 저지르고 묵인한 사람이 이 세상의 타락과 부패를 주도했다고 믿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옳았다. 바리새인이 된 기분이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예수의 손에 못을 박아 넣은 게 아니었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기 힘으로덕 높고 훌륭한 인간이 되려 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고 순전히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실패를 고백하는 건 쉬웠지만 실망을 견디는 건 내키지 않았다. 스스로의 비열함과 미천함을 간파하는 건 무주 자신으로 충분했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침묵하며 견디는 게, 시간이 나아지게 해주리라 기대하는 게 그럴싸해 보였다.

몸이 아픈 것보다 가책을 느끼거나 외로운 게 낫다.
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책은 아무리 심해도 육체적 통증을 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미줄이라고 해도 두 마리, 세 마리가 함께 있으면 안 됩니까? 왜 있잖아요, 공존. 여기서는 안 됩니까?"
"거미줄 하나에 거미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게공존이 아니야. 그건 자연계를 무시한 처사지. 한거미줄에 한 마리씩의 거미가 여러 개 늘어서 있는 것, 그게 공존이야. 다른 거미줄을 넘보지 않는 상태가 공존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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