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과 완적 모두 ‘광사狂上‘로 불렸지만 완적이 세상을 피하는 피세避世의 광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면 혜강은세상을 거스르는 오세世의 광으로 화를 불렀다." 

위진 시기를 풍미했던 현원遠, 임달任達, 광탄誕의 기풍
은 남북조까지 이어져 풍류의 여운을 남겼다. 도연명陶淵明이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물러난 것은 바로 이러한 풍조가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발적으로 세속적인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운 전원을 선택했다. 위진남북조시기의 지식인은 궁궐에서 죽림‘을 거쳐 다시 ‘전원‘으로 나아가는 변화 과정을 통해 정신적인 안식을 찾았으니 이는 생활 방식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 개체적 생명이 추구하는 바이자 그들의 정신적 이상이 깃든 장소로의 귀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역사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대야말로 중국인들이정신적으로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둔 시기였다. 모든 것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이 시기는 예술과 문학 및 후대 풍류 문인의 탄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사상은 현원遠을 탐구하면서 최정상에 올랐고, 문학의 업적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저마다.
최고임을 자처했다. 불교와 도교에서는 대사들이 운집했고, 역사저술도 계속 쏟아져 나왔으며, 서예와 회화도 최고봉에 오르기시작했다. 『세설신어』『문선』『문심조룡』 『수경주水經注』『안씨가훈氏家訓』『제민요술齊民要術』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등은 모두 이 시기에 나온 중요한 저술들이다. 북방의 명문세가들이 영가永嘉 시기에 남도함으로써 중국문화의 생태지도를 일거에 바꾸어놓았으니 참으로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또 북방척발씨가 한족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진남북조 시기에중국문화가 거대하게 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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