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천에 살지만 우리 반 누구보다로 똑똑하고 심지어 선하기까지 하다는 그런 ‘도덕적 우월감, 그러나내가 그걸 깨닫게 된 건 그 아이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걸실패하고 난 후였다. 그 아이는 끝내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나는 그 아이의 냄새에서 놓여나지 못했고, 끝나지 않은 구원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내 행동이, 내 마음이 결코 선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바탕에 놓인 건 오만과 치기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무서움을 누르느라 숨어서 책을 읽었다. 얼른 가라 얼른 가라 주문을 외우며 책을 읽다보면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주위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도 그즈음 생긴 버릇 같다. 귓구녕이처먹었느냐, 바로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어찌 못 듣느냐 책을읽다 말고 난데없이 등짝을 맞기 시작한 것도 그 집에서부터일어난 일이었지 싶다. 일부러 그런 적은 없었다. 정말로 들리지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빚쟁이 목소리도, 엄마의잔소리도, 화가 난 아빠가 밥상을 엎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가 좋아서, 모두가 있는 세상에서 아무도 없는 세계로들어가기 위해 나는 하루종일 책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좋아한다는 건 성공에의 예감 같은 걸 전파하는 법이다. 내가 책에 빠져 있는 건 아빠에게도 자랑이었지만 엄마에게도 그랬다. 나는 책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했는데,
엄마와 아빠는 책을 좋아하는 나를 통해 미래로 도망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 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눈 한 번휘두르면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눈물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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