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환경에서도 앨리슨 래퍼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순응과 체념은 그녀의 사전에 없었다. 장애인이니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했다. 그녀는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미술을 공부해 구족 화가가 되었으며 사진전을 열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힘썼다. 그녀가 맞선 편견에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해 장애인 엄마이자 미혼모라는편견을 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신체 일부만 가지고도 특별한 긴장을 자아내면서 그 자체로 조형적인 미와 완벽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
을 알아차린 예술가들이 있다. 로댕Auguste Rodin 이 대표자다. 그들은 여기서 영감을 받아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로 삼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팔다리 없는 조각을 보면서 누구도 장애를 문제 삼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토르소인 앨리슨 래퍼의 육체를 아름답게 보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앨리슨 래퍼는 자신의 몸을 현대의 비너스‘라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앨리슨 래퍼 조각은 위대한 정신적 승리‘를 이룬 인물에 대한 존경이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정상은 무엇인가 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이며, 남성중심의 역사와 사회, 문화에 던지는 젠더적 문제제기이기도한 것이다. 작가 마크 린은 단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탁월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작가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기위해 각업을 하기도 한다.

서구의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나와 다른너를 통해 주체를 형성했다. ‘나‘를 정상이자 기본으로 놓고나와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타자화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정상‘ 이었고 지금도 정상인 그녀의 몸이 유럽으로 와서는 ‘비정상‘으로 타자화된다. 다른 피부색, 커다란 엉덩이와 유방, 다르게 생긴 얼굴 모양은 야만이자 비정상이며 기형으로 치부되었고 유럽인들은 이것을 구경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정상인지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보라, 괴물 같은 인간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안전하고 정상이며 문명인이다.

사르키 바트만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의 세상에서 살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예였다. 야만인을, 괴물을 어떻게 자유롭게 풀어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에 가두고 ‘동물‘이라며 조롱하던 19세기 사람들은 정작 그녀의 몸을 따라 엉덩이가 부풀려진 페티코트를 입었다. 이건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매춘부를 혐오하던 사람들이 정작 매춘부들의 의상과 화장을따라 하면서 유행을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성의 몸은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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