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봉순 장편소설 소설문학 소설선
심봉순 지음 / 북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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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의 이야기다.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보다 더 절절할 수 있을까?

태백 출신의 작가가 쓴 이야기라고 했다. 본 터. 터에서 담아 올린 이야기는 힘이 있다. 잘 기른 양식 생선보다 좀 작고 상처가 있어도 대양을 넘나든 생선의 맛 차이 같은 것이랄까?

작가의 본 터. 그곳에서 쓰인 이야기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중학교때였다. 내 짝지는 작은 아이였지만 당돌하고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했다. 아이에게는 묘하게 술 냄새-그게 위스키 냄새란걸 나중에야 알았다-도 나고 달콤한 냄새도 나고 때때로 담배 냄새도 났다.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늘 아슬아슬하게 자리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던 친구. 학교가 마치면 부리나케 집으로 갔다. 문방구 앞에서 군것질을 할 시간도 없어보였다.

하루는 그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했고 따라나섰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대문 근처였고 아이의 집은 무려 동두천이었다. 그 먼 길을 새벽 첫 버스를 타고 등교 하고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친구의 집은 골목을 여러번 꺽어 들어간 곳에 있었고 천정도 낮고 어두웠다. 형광등을 켜도 뭔가 뿌연 낮은 조도.

라면을 끓여 먹고 친구가 말했다.

네가 처음이야. 우리집에 온 애는. 영광인줄 알어. 난 왕족이거든.

왕족? 니가?

응. 우리엄마가 양공주야. 그래서 왕족이지.

놀라운 고백이었다. 그 친구의 모든 냄새들의 정체가 확인되고 수긍이 되었다.

늦게라도 집에 돌아갈 참이었지만 너무 멀어서 엄마에게 알리고 하루를 친구와 자고 등교를 했다.

그 밤. 밤 새도록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는 그 친구의 본 터 였다. 본 터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들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고 절절하며 삶의 어떤 증거처럼 작용한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진희를 중심으로 친척들과 가족들, 이웃들의 이야기는 이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이어진다. 정말? 이라는 의문보다 그랬겠네 라는 수긍이 늘 준비되어 나올만큼 .외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탄광으로 흘러들어가며 가난보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과정은 드라마다 여러 책에서 보았던 것임에도 먹먹하기만 하다.

매일처럼 무덤을 들어가듯 시커먼 아가리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간은 더디고 잔인하게 흐른다. 그래도 온통 검은 칠을 해도 틀리지 않을 풍경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며 살아간다.

탄광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바람이 나고 치장을 하고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이 모든 행위들이 그들이 막되먹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이고 잔인하게 버텨낸 시간 때문이라는 것. 도망 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시커먼 갱도에 먹히거나.

진득하고 거친 삶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탄광에서 도망친 줄 알았지만 탄광의 시간은 끝끝내 자신을 증명하려 단단하게 숨통을 막는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라는 말을 떠올린다.

단지 탄광이 아닐 뿐. 매 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재를 사는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울어주지 못하는 죽음. 금방 잊어버려야 하는 죽음. 산 사람은 살아야겠기에 자꾸 잊혀지려는 죽음.

 

작가는 가족을 위해 날마다 탄광으로 들어갔던 태백의 아버지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막장. 그 막막한 곳으로 들어가는 가장들.

세상이 늘 아슬아슬한 탄광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랬다더라..라는 말을 뒤에 붙일 만큼 탄광의 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고 싶은 존엄에 대해 다시 묻는다.

 

사람들이 살던 곳. 태백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무열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상갓집 가서 너무 서럽게 울지 말라는 얘기였다. 너무 서럽게 울면 죽은 사람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만 같이 데리고 가게 된다고 했다. 저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질서가 있게 마련이라 가야 하는데 가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다면 가기 위해 같이 데리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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