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호미의 자식들이다.
호미는 무기도 못 되고 핏대를 세우는
고함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을 가꾼다.
들깨며 상추며 얼갈이배추 같은 것
또는 긴 겨울밤을 설레게 하는
감자며 고구마며 옥수수 같은 것들을 위해
호미는 흙을 모으고덮고 골라내며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돼 밭고랑에서 뒹굴기도 한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호미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이성을 증명하지만,
산 귀퉁이 하나 허물지 않은 그 호미가
낡아가는 흙벽에말없이 걸려 있다.



(호미. 중에서)

처리해야 할 사무와 변제해야 할 부채와
이루어야 할 약속이 길의 심장을
대체한 탓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속도에 부서지고
효율과 이윤에 몸을 내어주면, 몸이 먼저
그것을 아는 것이다.
높이 뜬 구름도석양에 가난해지는 강물도
누추한 슬픔이 되는 것이다.

죽음도 작아지고 마는 것이다.


(큰 싸움. 중에서)

그의 세계는 오로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위한
땡볕과 비바람의 복판인 것 같았다.
아니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그의 적일지도 모른다.
동네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언제나 그림자 같았고
진부한 안정을 깨뜨리는 무음(無音)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나의 적을 새로이 일깨워준다.

내일의 적이
막 현관문을 두드리려고 한다.

(폐지 줍는 노인. 중)

고요에 대하여

인간의 소리만 없으면 된다.
고요는 순백의 무음이 아니라
풀벌레 소리와 구름을 물들인
달빛과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바람과
건넛마을의 마지막 불빛이
모여 만들어진다.
고요는,
우리가 거리를, 법규를, 국가를
택하고 남은 나머지가 되고 말았지만
다른 목소리만 있으면 된다.
찌그덕대는 외양간의 문짝과
들판을 달려오는 경운기 소리와
마당의 흙먼지를
다독여주는 빗소리만
가득하면 된다.
버리고 온 것들에게
건너가는 귓속말이면 된다.

우리가 이룬 것들을
버리는 게 고요다.

몸 가진 것들이 모여
꿈을 만든다.

꿈이 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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