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신채호는 훗날 묘청의 난을 1천 년 내 제1대 사건‘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것은 고구려 계승 세력 대 신라 계승 세력, 자주당 대 사 대당, 진취적 개혁론 대 기득권 옹호론의 최후 결전이었다. 

 개경의 권문세족부터 지방의 향리들까지,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진오랜 지배층은 조선이 건국되자 양반 사대부로 변신한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행세하는 가문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더욱 엄격하고 정교해진 유교 통치를 들고 나왔다. 이전 시대와 도덕적으로 차별화하면서도항구적인 지배를 그럴싸하게 옹호할 길을 성리학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정욕을 억누르고 절의를 좇는다는 미명 아래 남녀의 진실한 사랑을 음란한 풍속으로 낙인찍고, 여성에게 정절이라는 족쇄를 채워 구속하는 통치 체제이기도 했다.

남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박씨는 어우동으로 흑화하기 시작했다. ‘어우동(於于同)‘이라는 이름은 ‘어울려서 통한다‘ 또는 함께 어울린다‘로 풀이할 수 있다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 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 이름은 그녀가 사용한 별명이었다. 어우동은 ‘이혼녀 아닌 이혼녀‘가 된 뒤 기생, 내금위 무관의 첩, 과부로 행세하며 남자들과 만났다고 한다. 법적으로 여전히 종친의 아내인 자기 신분을숨긴 것이다. 간통죄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어우동의 처형(1480)은 성종이 부부 싸움 끝에 폐비 윤씨를 쫓아내고(1479) 사약을 내려 죽이는(1482) 와중에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내가주목하는 포인트다. 우연 치고는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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