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암흑에서 왔다.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영원이란 무형의 테두리에 갇힌암흑이 나의 근원인 셈이다. 

그녀가 생각난 건 그 순간이었다. 기억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생각했고, 그 생각은 곧바로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 낯선 질감의 열망은, 뜻밖에도 크고 둥글고 섬세했다.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무도 찾아 주지 않아 정처 없이 표류하는 사람이 어느새 내 외로움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을 무대처럼만들어 상상으로 빚어진 배우에게 내게 닥친 외로움을 전가하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전가된 외로움은 내 것이면서도 내것이 아니었기에 깊이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나는 좋았다. 

이름은 집이니까요.
 서영의 두 번째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가정은 지속적으로 위로의 힘을 발휘할수 없다. 기대면 기댈수록 나의 문기둥은 흔들렸고 조금씩 부서졌다. 희미해지고 투명해졌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실망감을 안기기도 한다는 걸터득한 뒤부터는 괴롭거나 혼란스러울 때마다 주문을 외듯 문주와 문기둥을 연달아 되뇌는 습관도 버렸다. 위로의 유효기 간은 끝났고, 유적은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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