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내 작품이 책으로 나온 뒤에는 읽지 않는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한 달 후, 일 년 후
Dans unmois, dans un an》를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따금 나에게 내 작품의 등장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여러 이름과 장면, 이제 내게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교훈 같은 것들을 상기시켜준다. 내가 내 작품을 다시 읽는 데 이렇게 열의가 없는 것은, 내 책이 다시 읽을 만큼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꽂이에 수많은 다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미지의 책들이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게다가 나는 이미 그 책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 시간낭비가 아니겠는가!
어떤 작가의 경우에는 어느 한 구절이나 한 단어가, 마치 어느한 음색이 곡 전체에 영향을 주듯이 작품 전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내 경우에는 작품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슬픔이여 안녕》에서는 안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이 한낱 정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바로 그렇다. 그 순간 독자 역시 안이 이 이야기에서 비운의 존재가 될 것임을 안과 더 불어 깨닫는다.
그리고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열여덟의 나이에 사강으이미 사강이었다. 1954년 한 대담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렇게말한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