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릴과의 사랑은 많은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무엇보다도 권태가, 고요가 두려웠다. 우리, 그러니까 아버지와 나는 내적으로 고요해지기 위해 외적인 소란이 필요했다. 그리고 안은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으리라.

 아버지가 때때로 여자에게 느끼는 강한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런 욕망을 억제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 복합적인 감정으로 고양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물질주의자였다. 하지만 섬세하고 이해심 많고, 그러니까 참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가슴속요망에 쫓겨 실수를 저지르기를 바랐다. 안이 우리의 지난 삶을 경멸하는 것을, 아버지와 내게는 행복했던 그 삶을 그토록 간단하게경멸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모욕하고 싶은 것이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안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의 개인적인 가치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시적인 육체적 욕망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가 어떻든 자신이 옳기를 바란다면, 우리를 잘못된 사람들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했다.

안은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개체였음을.

다만 파리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만이 들려오는 새벽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때때로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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