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깨어보면 사물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나는 안다 밤새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방황했고 얼마나 고독했는지 나는 안다 그들도 살아
있음을 치열하게 숨쉬고 번민하고 사랑하고 아파한
다는 것을

(내가 잠들면. 중)

소년은 의자처럼 우울했다.
그런 날이면 소년은 한 송이 개나리를 살해했다.
죽은 개나리꽃 입에 물고 거울에 갔다.
거울 속의 소년을 찾아갔다.
거울 속에 피 흘리는 꽃들이 없었다.
비명하는 하늘도 무너진 집도 응급실도 없었다.
 거울 속은 언제나 평온했고 고요했지만 
거울 속의 소년도 몹시 외로워했다.

(거울 속의 소년. 중)

새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퍼진다
아이들이 새소리에 따라 합창하기 시작한다.
삼삼은 앵무새 삼사는 지하철
요 말썽꾸러기 놈들!
선생이 씩씩거리며 교단을 오가는 동안
삼오는 흰 구름 삼육은 자전거
유리창은 모래밭이 되고
천장은 하늘이 되어 둥글게 둥글게 솟아오른다.
칠판은 벼랑이 되고,
책상은 물고기가 되고
아이들은 구름을 통과하는 비행기가 된다.
삼칠은 선인장 삼팔은 코뿔소
선생이 귀를 틀어막으며 교실을 나가버린다.
벽들은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아이들이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뛰어놀기 시작한다

(산수시간. 중)

무엇이든 파는 가게

구두를 벗어주면 구름을 파는 양말을 벗어주면,
양배추를 파는 아름다운 가게가 있어요 여주인은
아주 예뻐요 꽁치처럼 예뻐요. 당신이 시계를 벗어 
주면 주전자를 팔아요 뚜껑을 열면 천 년 전의 초원 
과 하늘이 보이는 아라비아 주전자를 팔아요 당신이 
두 눈을 뽑아주면 맑고 투명한 아이의 눈알을 팔아
요 해도 팔고 달도 팔아요 구름으로 만든 소파도 팔
아요 한 칸 한 칸 서랍을 열 때마다 당신의 꿈이 보
이는 책상도 팔아요 당신이 그림자를 벗어주면 새를
팔아요 지친 당신을 태우고 창공으로 높이높이 날아
가는 날개 달린 빗자루도 팔아요 봄도 팔고 봄밤의
라일락 꽃향기도 팔아요 한 알만 먹으면 우울도 불
면도 일순간에 사라지는 알사탕도 팔아요 에드바르
트 뭉크가 쓰던 피 흘리는 붓도 팔고 그의 잘린 손도
팔아요 시간도 팔고 죽음도 팔아요. 해골도 팔고 성
기도 팔아요 관도 팔아요 그린 가게가 있어요 동해
안에 있어요 바닷가 자살 바위 아래에 있어요 파헤
쳐진 시체처럼 있어요 이번 주말에 갈 거예요 혼자
서 갈 거예요 기차 타고 갈 거예요 염소 타고 갈 거예


(전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