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방영된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인기가 있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미실‘이라는 이름이 옮겨다녔다. 그 사극의 마지막회에서 비담이라는 인물이 선덕여왕을 찾아간다. 피투성이가 된 채 생각한다.
‘덕만까지 이십 보‘, 쓰러졌다 일어서며 다시 ‘덕만까지 십 보‘..
그 장면이 뭐라고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녀가 떠나기 열흘 전.
이라고 말하고 싶었나보다. 이미 그녀는 고대의 폐허 속으로 떠난 걸 알면서도 해마다 그 이름을 부르면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따끈한 모래처럼 다녀갈 것 같다.
살았다는 흔적을 돌판에 새긴 것도 아니고 언덕에 묻어두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소중한 폐허다.

투병중임에도 발굴의 현장에 있던 그녀는 긴 시간과 사람의 이야기를 찾았을까? 아니면 세상에 미처 이르지 못한 잔소리를 묻었을까?

멀뚱히 달력을 보다. 어? 벌써 일 년이 지나간건가?
열흘이면..
이런 생각 속에 ‘허수경‘을 부른다.
그녀는 신화처럼 슬쩍 다녀가겠지..

문헌학이 증언하는수메르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셈어 계통의 차용어들, 행정 문서 속에 등장하는 인도게르만어 계통에 속하는 인명들은 성을 넘어 들어와 있던 타인의 자취이다. 이 타인의 자취를 자신의 어머니에 속하는 언어권으로 들어앉히는 일은 고대인들이 그 당시 발견했던, 관용의 정치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계속 이동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를 호모모빌리쿠스ilomomobilicus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생물학적인 근본 자연 가운데 하나를 고향 떠나기로 간주하기도 한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많은 이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뿌리를 떠나는 고전적이고도 수없이 되풀이된 이 행태는,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행태만은 아니다. 떠나온 쪽을 향하여 계속 눈길을 돌리는 것도 또한 고전적인 행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나는 참담해졌다.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나는 언제나 혼자 이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 나는그 순간, 그 여인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가진 단 하나의 구체적인 느낌이었다.

이 신화 속에서 타인은 외부에서 내부를 위협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내부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 이 거대한 군사적인 힘이 필요한 정치 행위를 실제로 옮기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타인을 받아들이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타인 이데올로기‘
를 그들의 사회 속에서 생필품으로 삼아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편견과 사실 사이에 어쩌면 진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깊숙이 모자를 눌러쓰고 편견의 수관성 앞에도 사실의 객관성 앞에도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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