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어른들이 커서 뭐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버스차장‘ 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매일 차를 타고 멀리까지 다니는 유니폼 입은 언니들이 멋있었다. 차가 가고 서는 것도 언니들의 말이 떨어져야 했다.‘써~~ㅂ(스톱)‘ ‘오라이~~‘
이런 언니들은 드라마나 영화에도 단골로 나왔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애인을 위해 희생하다 버림받는..
공부에 취미도 소질도 없지만 남자니까 교육을 받아야하고 대학도 가야하는 오빠(혹은 남동생)을 위해 중학교 대신 공장으로 가야하는 누이들..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며 특정되는 일이 아닌 오만가지 일을 해내며 무시와 멸시까지 받아내야 하던 식모.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건 이모 때문이다.
‘언니.(우리 엄마) 생각나? 그 갈월동집. 내가 거기서 식모살 때 그집 아들이 하루건너 나를 팼잖아. 진짜 패물이랑 싹 훔쳐가지고 도망가서 그 집안 망하게 해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거 없다고 망할 위인들이 아니었던거지. 아유 내가 도망쳐봐 보증 선 사람 집이랑 우리집이랑 다 엎을건데. 엎는게 뭐야 뭐 하나라도 훔쳐갔다고 덮어씌워봐. 이름에 빨간줄 가면 xx이랑oo이는 (삼촌들) 어떡하냐구 글쎄. 내가 그때 그 쌍놈새키가 꼬챙이로 찌른 데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대. 분하고 분해서‘
명절 때 모이면 이모는 그 때 이야기를 한다.
누구라도 알아달라고..이모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거다. 하지만 엄마나 삼촌들은 못마땅해한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자꾸 얘기하고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저만 고생한거 같이 생색은!

정말 다들 그렇게 살았을까?
일제강점기에 가속화된 여성의 취업. 그 이면엔 여성의 주인의식 주체성 같은 이유가 쪼금 있었을테고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떠나보냈거나 떠나온 어린 일손들이었다. 그들을 고용하고 억압하며 싼 비용으로 착취한 자들은?

역사적, 사회적 분서과 다양한 매체의 자료들 그리고 생생한 인터뷰가 압권이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엄마가 술집여자 출신 빠순이라고 한사코 인사도 안시켜주며 더러운 여자라던 한 친구와
우리엄마 양공주야! 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던 친구가 생각 났다.
그냥 ‘우리 엄마야‘ 라고 하지..그냥.

탄탄한 자료들이 뒷받침 하고 있는 책. 나이 탓인가..자꾸 훌쩍거리며 읽는다. 마저 다 읽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아..리..다.


순이‘는 직업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식모는 식순이, 버스안내양은 차순이, 여공은 공순이‘로 불렸다. 술집 종업원은 빠순이‘였다. 당시여성들이 가장 활발하게 진출한 식모·버스안내양·여공은 뭉뚱그려 삼순이‘로 불렸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듯 이 순이‘는 그들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였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어린 여성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동정보다는 유린이 훨씬 많았다.

그들의청춘은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다. 화려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그들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 인권 유린과 매연, 어둠침침한 조명아래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을 겪으며 청춘기를 보냈다. 이름과 반대로억척스러워져야 했다. ‘억순이는 가장 모순적인 이름이다. 모진 고생의대가가 정당했는가? 그러지도 못했다. 세상은 한 술 더 떠 그들을 삼순이라고 조롱했다. 이 억압적인 상황에 이의를 제기한 삼순이는 극소수였다. 그때마다 작명가들은 자신들이 지은 이름대로 행동하기를 요구 했다. 그렇게 그들은 묵묵히 참는 곰순이‘가 되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하느라 제일 먼저 일어나 제일 늦게 자는 식모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6시간 이상이었다. 틈틈이 쉬는 시간에도 주인의 명령과 지시에 대기해야 하므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마당에 정기적인 휴일이 있을 리 없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을만나면 한 달에 한 번 쉬거나 추석이나 명절 때 집에 갈 수 있도록 휴가를 보내주는 게 고작이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4월 28일자는
"머리 빗을 시간도 없는 식모들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의 휴식시간을줄 것을 당부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의 능률을 더 낫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금도 최저 수준이었다. 조선인 가정의 경우 1910년대 중반까지는월 3원 정도였고, 1920년대 후반에 5~6원, 1940년대 8~10원으로 인상되었다. 1921년 기준 쌀 한 가마니(백미, 80킬로그램) 가격은 16원 4전이었다. 두 달 뼈 빠지게 일해도 쌀 한 가마니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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