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 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한국의 풍경
김경일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공정위원장 청문회에서 모 의원이 미혼의 장관 후보에게 출산을 했으면 100점이었을 거라는 망언을 했다. 곧바로 각계에서 다양한 반박과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발언의 당사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거나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부모의 결정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초야를 치르며 서로를 확인하는 것이 혼례였던 때로부터 겨우 백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아직도 차례와 제사를 지내고 있는 그 저변의 사고방식들을 파고들자면 근대를 벗어났다고 단언키 어려울지도 모른다.
식민지상황에 유입되기 시작한 자유주의의 열풍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들이 혼재된 상황에서 제일 먼저 자극된것이 연애와 결혼 이었던 것도 같다.
소위 신여성이랄지 신지식인이랄지 하는 계층의 확장과 억압된 상황에서 폭발적인 반향이 일었으리라고 짚어진다.
지금에 이르러 조혼은 커녕 만혼과 비혼이 자연스럽고 출산에 대한 결정권도 당사자들의 몫이 되었지만 이것이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떠밀리고 떠밀려 포기하게 된 징후라는 것에 생각이 닿는 까닭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밀려난 청춘들과 근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정치인들이 혼존하는 현실은 암담할 따름이다.
일단 책이 재밌다. 당시의 보도내용과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문학작품 속에 보이는 상이한 관념과 주장들의 부딪힘이 아주 역동적이다. 수치화 된 표로 보여지는 당시의 상황들도 ..
삼천리 앙케이트도 다시 펴야겠다.
흥미진진한 판이 읽힌다.
이처럼 이 시기 지식인들은 이상적 결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이면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도식적으로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랑이나 자발성과 같이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요소에 좀 더 주목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민중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위한 헌신을 더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양자가 분명하게 구분된 형태의 논의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이상적 결혼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고 모호했지만 이들은 모두근대적 자유결혼과 사랑에 입각한 결혼이라는 근대적 교리를 부정하 지는 않았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정치적 억압과 민중의 빈곤이 상존하는 식민지에서 이상적 결혼이란 바로 그러한 식민지 현실을 직시하고 그를 개조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주목할 점은 김창제가 여자가 무식해도 무방하다고 언급하면서 가족주의를 들먹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혈통과 가족주의는 가부장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여성의 무지는 남성 중심의 전통적 가부장제의유지·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남성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성의 지식 유무를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삼았던 사실은 식민지 시기 후기로 갈수록 왜 지식 있는 신여성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구여성과 똑같이 취급되고 말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조혼의 원인으로 가족주의 가치에 대한 매력, 자녀를 통한자기 과시 욕구의 충족, 가족 단위에서 노동력(여성의 경우 가사 노도남성의 경우 농업 노동)의 확보, 미신적 이유 혹은 불안한 사회 상황 등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자기 과시 요구라든지가족 단위에서 노동력의 확보 혹은 미신과 같은 요인들은 전통 사회에서 조혼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로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끈질기게 잔존하고 있던 전통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2세 교육을 통한 국가의 존립과 어머니로서 여성의 책임을 연관시키는 논리는 일제가 강제로 병합한 1910년에도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민영대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무교육주의를 봉쇄주의封鎖主義와 내방주의內房主義 로 표현하면서 비판한다. 그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주요 논거를 현모양처에서 찾았다. 여자의 교육은 "양처현모 되게 하는 것이 최대한 목적" 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웅의 모가영웅이 아니며 영웅의 처가 영웅이 아닌 자 있느냐고 반문하고 양처현모의 목표를 위해서는 불가불 여자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여성 자신도 자신이 교육을 받는 주요 목적이 "반드시 양처현모" 가 되는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민영대 1918(2); 홍양희 1997: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