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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이쯤에서 나도 고백해야겠다. 어떤 소설은 그림이 쓰기도 한다는 걸. 그림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는 걸.
-편혜영 작가 노트 中-
때론 그림이 소설을 쓴다는 말에.. 새삼스럼게 전에 읽었던 작품들이 주루룩 떠올랐다. 하나의 작품 속에 드리워진 인물의 눈빛 속에서도 작가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쏟아져 펼쳐진다. 물론 화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작품을 표현하였을지.. 그 작품의 진정한 내막은 따로 있을지 모르나,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화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진정한 기쁨은 이런 상상에서도 존재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을 통해 베르메르를 사랑했던 한 소녀의 간절한 마음을 한권의 멋진 소설로 그려냈다. 라헐 판 코에이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마리의 개를 통해 심한 곱추에 천대받는 바르톨로메란 소년을 창조해 냈다. 화가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어떻게 그림을 보고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란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었다. 그림을 통해 다른 예술을 창조해내는 것은 비단 문학 작품뿐만은 아니다. 무소르그스키는 죽은 친구의 작품 전시회를 보고 영감을 얻어 <전람회의 그림>이란 장대한 스케일의 곡을 완성해낸다. 그림을 보고, 문학 작품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면 작가의 상상력과 나의 느낌이 증폭되면서 그 감동이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다.
<저녁의 구애> 솔직히 작가노트를 읽기 전까지 이 작품이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썼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작품은 같은 이름의 프리스 쉬베리의 그림 <저녁의 구애>를 보고 썼단다.
<제목이 ’구애’라고 하니, 그렇군...하지, 사전 정보 없이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림 속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르는가? 머뭇거리는 듯한 남자의 모습에서 구애의 상상을 떠올려 보면, 얼핏 지루해보이는 이 그림이 재밌어지기도 한다.^^>
작가 편혜영은 이 머뭇거리는 구애의 장면에서 또 다른 구애를 떠올린다. 소설 속에 구애는 다소 무겁고 충동적이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주인공 김은 죽음을 앞둔 친구의 어르신의 장례식에 화환을 보내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라 화환만 주고 나오려 했지만, 어르신이 아직 돌아가시지 않아 장례식장 주위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후 늦게 만나기로한 여자친구에게선 자꾸 전화가 오고, 어르신이 빨리 돌아가시길 기다려야만 하는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가신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자는 심정으로 속히 죽음을 기다리는 와중 자꾸 전화를 하는 여친에게 그는 이별을 통고한다. 기다리는 순간이 지겨워졌고, 여자와의 관계도 사랑의 관계도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김은 갑작스런 사고를 목격하고, 자신과 닮은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된다. 그 순간 충동적으로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구애를 한다.
구애나 고백은 진실과 상관없는 일이다. 또 진실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구애나 고백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어떤 고백은 주저와 변덕을 부리느라 허약해진 마음이 부추기고 어떤 고백은 쓸쓸하고 외로운 밤이 충동한다. 어떤 고백은 홀로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지한다. ~~그러고 보면 고백이다 구애는, 인생의 많은 장면들이 그렇듯, 모두가 진실인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p.84>
이 작품을 다 읽고 다시한번 쉬베리의 그림을 쳐다봤다. 구애를 받는 여자의 모습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 마치 어려운 부탁이나 난해한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 표정이다. (뭐 구애가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다.) 편혜영씨의 작품도 그렇다. 주제가 과연 <구애>인 것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이 작품은 다소 몽환적이고 불투명한 느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제목을 모르고 봤을 때 알 수 없었던 쉬베리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또한 설명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이런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