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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세기의 재판이야기
박원순 지음 / 한겨레신문사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법정 영화를 보면,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반전의 반전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물론 영화니까...'라는 생각을 하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법정사건만 들여다 봐도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현대 가치관으로는 말도 안되는 엉뚱한 죄목으로 희생당한 사람들도 많고, 예나 지금이나 정치 또는 어떤 커다란 외부압력에 이용당하고 짓밟힌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건들이 현대에 와서 재해석되고, 일부 사건의 경우 죄목이 복권되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
이 책은 몇 가지 세기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중에는 너무 유명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지만, 각각 재판 과정의 세세한 설명을 통해 과거의 역사와 현대 사회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아 저건 말도 안돼(잔다르크 외), 저런 걸사람들이 믿는다니 정말 바보같다(중세 마녀 재판 외)라고 생각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솔직히 말도 안돼고 바보같은 일들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다. 현대 정부의 말도 안돼는 짓거리들과 그걸 편견없이 믿어버리는 일부 우둔한 대중들을 보면, 과거 얼토당토 않은 수많은 사건들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신념이나 정의란 것이 '시대를 초월하여 통할까'..라는..현대의 정권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후대에 어떻게 평가될는지는 두고 볼일이지 않은가...라는... 물론 그 생각 마저 꽤 회의적이긴 하지만...국민의 눈을 속이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에만 급급한 이 정부에서 어떤 신념 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생각이다. 또 그런 정부의 휘둘림에 그대로 순응하는 국민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란 말은 잘못 해석되어 꽤 오랫동안 절대권력의 상징적인 의미로 기득권층이 이용해왔는데, 잘못된 관습과 법은 투쟁과 저항을 통해 고쳐나가야 한다.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은 대부분 신지식, 신이대올로기를 지닌 눈뜬 지성들로 기존의 악습과 페단, 그리고 구체제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신념으로 저항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투쟁은 결과적으로 목숨까지 내놓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인해, 현대의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고, 현대의 사회문제에 대해 시사해 주는 점도 많았다.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육군장교로 군사정보를 독일에 전했다는 스파이 누명을 쓰고 투옥된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군부는 패전의 책임을 면할 만한 희생양이 필요했고, 유태계 장교였던 드레퓌스는 그것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악마의섬에 유배된다. 몇년 후 진짜 범인이 발견되었지만, 진범을 고발한 사람이 오히려 체포되고, 드레퓌스의 무죄는 묵살된다. 온 나라가 뒤레퓌스를 유죄로 몰고갈 즈음, 프랑스 작가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작품을 통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이슈가 되었고, 반유태주의, 인종차별주의에서부터 양심적인 지성인과 수구적인 음모세력 사이에 갈등은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죄가 입증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국가가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시민을 희생양으로 어떻게 그들의 정권을 연장해 가는가를 보여 주었고,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운동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맞선 드레퓌스도 대단하지만, 드레퓌스의 신념을 믿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참과 정의를 외쳤던 에밀졸라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정치인 클레망소는 에밀졸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 반항하며 그에게 경배할 것을 거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고 오도된 대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라고...잘못된 정부의 정책에 바른말로 맞설 수 있는 에밀졸라와 같은 깨인 지식인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았으면 좋겠는데... 현실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왠지 불편해지는 이유는 과거 잘못된 역사의 잔존들이 현대 우리사회에서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일꺼다.
P.S 책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말은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 처형된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모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한 말이라고 한다. 조금 잔인(?)한 문구긴 하지만, 이 책 제목과 함께 이 책의 기억이 꽤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