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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있어 여행이 즐거울 때는 여행을 준비할 때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차 안에 있을 때다. 여행은 여행 그 자체보다 기대하고 기다리는 설레임이 어쩌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설레임도 좋고, 여행도 좋지만, 이 책을 통해 내게 있어 여행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다. 여행이란 것에 어떤 의미를 둔다는 것이 어쩌면 다소 부담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 '넌 왜 여행을 가니?'라고 묻는다면 단순히 그냥 좋아서라고 대답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더군다나 이 책을 읽게 되면, '내가 하는 것이 과연 여행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어 지나간 여행을 떠올려보면, 뭔가 중요한 것들이 듬성듬성 빠진 느낌이 드니 말이다.
나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일상에서의 탈출?? 기분전환?? 이국적 정취에 대한 기대?? ...극기훈련?? 돈지랄??
짧은 휴가 일정에 부랴부랴 날라가서 이곳저곳 후루룩 발도장 찍고, 기념으로 사진 팍팍 찍고, 모 하나라도 더 보겠다고 무리해서 다리품 팔아가며 돌아다니고, 야간 경치 보겠다고 밤에 잠도 안자고 또 기어나온다. 호텔비 하루 아낀다고 비행기에서 1박하고 그 다음 아침부터 시작되는 여행 일정은 여행이 아니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개고생(?)이다. 학생 때는 그 먼데까지 고생하며 차타고 가서 밤새 술푼 기억밖에 없다. 그냥 학교 근처 방이나 하나 잡지, 뭐하러 그 좋은 데까지 가서 술을 펐나 모르겠다. 왔다갔다 차비만 아깝게..
'개고생'이란 극단적인 표현을 쓰긴 했지만, 난 그 개고생을 즐기는 것 같다. 내게 있어 여행이란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를 그냥 막~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잠을 좀 못자도 체력이 딸려 죽을 것 같아도 열심히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사진 찍는 것도 즐긴다. 어떤 때는 한곳에 사진기를 장착해 놓고 같은 배경으로 온갖 잡다구리한 포즈를 연출해내기도 한다. 급기야는 점프샷까지 날린다... '저것들 어느나라 사람들이야?'라며 지나가는 외국인이 흉을 볼지도 모르겠지만, 외국나가면 오히려 쪽팔린것도 모르겠더라...(국가 망신이라고 욕하지는 마세요;;) 멋진 외국 남자를 어떻게든 렌즈 속에 들어오게 각도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돌아다니기 위해, 사진 찍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결국 여행의 중심에는 나만 있다는 것을 깨닮았다.
튀어나온 담벽 벽돌 하나에도 느낌을 떠올려 보고, 지나가는 새소리 하나에도 귀기울여 보고, 작품 속 화가가 보았을 풍경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는 그런 여유와 감상은 내 여행 속엔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이 풍경은, 저 건물은, 저 성당은, 저 유적지는 하면서 여행 카탈로그 속에 나와 있는 사진의 모습을 그저 눈으로 다시한번씩 찍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지나침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 한방 남기는 것으로 내 여행의 목적을 이뤄었다 생각했다. 내 여행은 '그저 내가 잠시 그곳에 있었던 것 뿐'이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여행의 기술이다. 여행을 가야하는 이유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스망스, 보들레르, 호퍼, 플로베르, 훔볼트, 러스킨, 반고흐 등 유명 예술가와 과학자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며, 그들의 여정과 작품 속에서 여행의 의미를 하나씩 짚어간다. 방대한 문헌의 응용과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특한 생각과 관점의 차이는 역시 알랭드보통다웠다. '알랭드보통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아마 그사람 책을 한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책이 기존 여행서에선 절대 접하지 못하는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다곤 하지만 완벽한 여행 기술서는 아닐 것이다. 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하지만 난 이 책을 통해 나의 여행을 되돌아 떠올려봤다. 하나씩 하나씩 기억을 되새기며, 난 내 추억의 구멍을 조금씩 메워가고 있었다. 지나간 기억은 흐려지게 마련이고, 어떤 것은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지만, 새록새록 다시 떠올리는 기억들은 점점 진해져서 내 입가엔 어느 덧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내 여행이 이 책에서 얘기하는 의미와 조금 거리가 있을지라도 내 자신은 내 여행들이 모두 기분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개고생을 했어도, 밤새 술만 펐어도, 같이 간 동료와 싸워서 반나절을 말한번 안섞고 삐져 지냈어도, 식중독으로 아무 것도 못었었어도, 길을 잃어 방황했어도, 외국인에게 더 비싼 값을 부르는 상인과 싸웠어도, 비를 쫄딱맞아 밤새 드라이로 젖은 옷과 운동화를 말렸어도, 물건을 잃어버려 말안통하는 현지 경찰서 직원 앞에서 버벅댔어도, 공항에서 덜덜떨며 밤을 지샜어도, 미친듯이 밥이 그리웠어도.....
내게 있어 여행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되새기면서 즐거워지는 것....!
비록 여행의 중심에 오직 '나'만 존재할지라도, 그래서 진정으로 느껴야 할 것들을 모두 건성으로 지나쳤다고 해도...내가 그 여행에서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하지만 앞으로의 내 여행은 조금은 다른 것을 보고 느끼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내 자신이 거기 존재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내가 존재해 있는 주변의 풍경과 의미를 진정 하나하나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눈으로 보기 위한 여행이아니라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에 쫓기듯 미친듯이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그곳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긴 휴가일 뿐이다..;; 그게 내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내게 있어 최대의 불행이라는 것...~
리뷰를 쓰려 했는데, 내 여행기억이 우르르 떠올라 정작 책 내용은 거의 쓰지 못했네.. 하여간 '알랭드보통'의 다른 책에서의 기술 방식은 내겐 좀 거리가 있는 듯 느껴졌었는데, 요책만큼은 꽤 친근하게 다가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