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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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감각적이면서 서늘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소설을 한편 만났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 오직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이 책을 펼쳐 읽는 동안의 그 기분은 이 책의 내용만큼이나 특별했다. 이 책이 내게 특별한 느낌을 주는 첫번째 이유는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이 어둠을 둘러싼 작은 불빛의 현재만큼 고요하고 감각적이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가 내 옆에 붙어 책속의 화면을 지켜보며 주인공의 행위를 하나하나 잔잔한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소설 속 주인공은 설명하는 사람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잔잔한 목소리가 실제 내 귀에 들리는 느낌이었다. 시각이 통제된 어두운 주위 환경에서, 내 모든 감각은 초긴장 상태로 어떤 작은 것 하나에도 꽤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초침소리마져 신경이 쓰였다. 마지막 장면엔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침잠된 어두운 배경에서 다가오는 보색의 색체의 향연은 더욱 자극적이고 감각적이었다. 아우라의 초록 드레스, 양의 목을 따서 낭자하게 흐르는 붉은 피, 불타는 고양이, 토끼의 빨간 눈, 기이한 향이 나는 음지식물들...책속의 모든 불쾌하고 기묘한 소재들과 환각을 일으키는 듯 내 주변의 고요한 환경과 더불어 나를 더 긴장케하였다. 지금은 이 책의 내용이 그다지 공포스럽게 느껴지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난 꽤 무서웠었던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너'인 펠리페이다. 화자인 '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은 전에 읽었던 로브그리예의 <질투>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즉, 소설의 화자가 소설 밖에 있는 경우이다. 이런 구성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독자를 더 긴장하게 하고 집중하게 하는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가 '너'인지, '너'가 '나'인지 그 진정한 의미가 헷갈린다. 어쩌면 '나'와 '너'가 동일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혼란스러운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속았다'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꽤 신선한 충격이다.

 

주인공 '너'인 펠리페는 콘수엘로라는 노파의 의뢰로 60년 전 죽은 노파 남편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콘수엘로 노파의 저택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퇴락하고 어두침침한 곳이었다. 그 노파는 아우라라는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펠리페는 이집에 머물면서 조카 아우라에게 걷잡을 수 없는 욕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허상과 현실이 뒤집히고, 과거와 현재가 무너지면서 섬뜩한 결말로 치닫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불을 켜고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쳐다봤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누군가는 나와 같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  또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했다. 누구나 영원히 늙지 않고 아름답길 꿈꾼다. 그것은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루기도 하고, 욕망에 눈이 멀어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망각하기도 한다.

 

이 책, 생각할수록 되새길수록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또 푸엔테스에게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라틴문학에 슬슬 빠져들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이 있다. 푸엔테스의 작품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아는데, 번역된 것을 거의 없다. 정말 슬픈일이다. 다양한 라틴문학들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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