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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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라틴 문학에 관심을 갖던 도중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은 제목 <안개>처럼 작가가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쉽게 와닿지 않았다. 이야기의 전개가 어렵다거나, 줄거리가 지루하다기보다는 다소 얼뜨기(?)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이런저런 관념적인 생각들이 모두 명확하게 내 속에 꽂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인공 아우구스토가 거리에서 한눈에 반한 에우헤니아를 쫓아가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우헤니아에겐 이미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에우헤니아를 향한 그의 관념적 사랑과 복잡한 현실이 꼬이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는 듯 싶지만, 결국 그녀의 배신으로 끝나버린다. 그 배신의 고통을 참지 못했던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결심한다. 이것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줄거리는 다소 유치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중간중간에 내재되어 있는 끊임없는 주인공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철학적, 관념적 생각들과 친구 빅토르와의 대화 등은 이 소설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끼게 했고, 단순한 사건의 줄거리를 넘어선 그 내막들은 꽤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려는 찰나, 갑자기 작가 우나무노가 소설 속에 직접 뛰어든다. 이 책의 진정한 백미는 후반 31장 여기서부터이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 앞에 나타난 그는 "너는 자살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라고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토란 인물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환상의 산물일 뿐이므로 아우구스토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살을 허락하지 않는 작가와 논쟁하는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창조자인 작가 우나무노와 피조물인 주인공 아우구스토, 그들 중 진정한 실체는 누구일까?  아우구스토는 소설 속 등장인물인 자신을 작가의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다면, 신 또한 같은 마음으로 작가 우나무노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자신은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존재와 허구의 실체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현실은 소설이되고, 소설이 현실이 되는 독특한 상황을 작가는 '소셜'이라 표현한다. 우리 모두가 '소셜적 실체'에 불과하며, 결국은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더 큰 무한한 존재에 의해 조정되고, 운명지워진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을 난 두번이나 다시 읽었다. 우나무노와 아우구스토의 다소 추상적인 문답들이 역시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누구든 운명에 굴복하여 결국 '죽음'이란 것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주인공 아우구스토처럼, 창조주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자율적 의지를 가진 존재하는 것이다. 또 내 존재가 실체든 허구든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기 있고, 지금 생각하는 한 내 존재는 바로 여기 현존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무한한 신의 존재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난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아갈 내 자신의 구체적인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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