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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면, 이 가을 난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대답할 수 있다. "네 좋아해요.." ^^
책속의 시몽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 장면을 떠올리면 몸에 전율이 일만큼 손끝부터 지릿 저려온다. 꽤 근사하고 낭만적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는 내게 그렇게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상상만으로도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지만..ㅋㅋ 웬지 즐거워진다. 브람스의 음악만큼 가을에 어울리는 것도 없다. 프랑수아즈 사강, 그리고 브람스.... 그 두사람이 불지핀 가을 정취로 이 책을 읽는 내내 취해버렸다.
39살의 실내장식가 폴과 그보다 나이가 좀더 많은 로제는 오랫동안 연인 사이다. 너무 오래 사귀어 로제에게 익숙해진 폴..둘 사이에 서서히 권태가 찾아올 무렵, 폴에게 25살의 매력적이고 잘생긴 변호사 시몽이 눈앞에 나타난다. 시몽은 폴이 실내장식을 의뢰받은 부인의 아들이었는데, 폴을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다가선다. 폴보다 14살이나 어린데다가 눈에 띨 정도로 잘생긴 외모..게다가 조금 능글능글한 구석까지..시몽에 대한 나의 처음 느낌은 잘생긴 부잣집의 날나리 도련님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소심하고 또 마음이 약하며 순수했다.
무작정 폴을 찾아 기다리고, 한없이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시몽.. 이 남자 꽤 로맨틱하고 귀엽잖아...
일요일 아침,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있는 것을 발견한다. 시몽에게서 온 것이었다. 연주회에 같이 가자는 내용과 함께 덧붙여진 이 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p.57>
얼핏 진부한 삼각관계의 삼류 연애소설 같은 줄거리 같지만(만약 내가 이소설의 줄거리를 미리 알았더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운 문장은 한편의 매혹적인 작품으로 내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들어왔다. 폴과 시몽의 이야기는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인지 평생을 연상의 여인 클라라를 위해 마음을 바쳤던 브람스의 순애보적인 사랑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내게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또 슬프면서 아름다운 브람스 3번 교향곡이 자꾸 머릿속에서 윙윙 돌았다.
일시적 사랑일지도 모르는 시몽과의 열정과 오래된 연인 로제와의 익숙해져버린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폴의 마음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서 읽는 내내 나또한 마음이 저렸다. 폴을 향한 시몽의 순수하고 헌식적인 사랑도 애틋했고, 폴, 시몽, 로제 세사람의 틀어진 관계와 그들 각각의 마음에 모두 신경이 쓰였다. 너무 몰입했던 나머지 나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가 슬프고 마음 아프기도 했다가 분노에 화를 내기도 했다 하면서 빠져들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물음표가 아닌 점 세개로 끝나는 것을 고집했다던 사강
그 점세개의 의미가 어렴풋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