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볼 생각이라면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p.6> 이 책은 작가의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도입을 얼럴뚱땅 넘겨 읽고 이 말뜻을 책을 다 읽고나서 깨닫다니 마치 갑자기 뒤통수를 맞아 멍한 기분이 든다. 작가는 이 문구를 시작으로 쌩뚱맞게도 상피에르섬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쟁이 루저 실리바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마치 앞으로 할 자신의 이야기는 사실만 있다는 것처럼 착각하게...진짜 기가막힐 정도의 구라쟁이는 바로 작가 김언수씨였다.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라는 작가의 소감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세상엔 별의 별일이 참 많다. '세상은 요지경'이란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가끔 해외 토픽이나 믿거나말거나 같은 데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들을 보면 과학이나 상식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돼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현상들에 대해 평소에 제법 관심있게 지켜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이런일이 가능한 걸까?'라는 많은 의심을 가지면서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했다. 새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혀 안에 도마뱀을 키우는 사람, 휘발유나 유리 철근을 먹는 사람, 고양이로 변신하고 싶어하는 사람, 남녀 생식기가 모두 붙어 있어 자가 임신을 할 수 있는 사람 등등이 소개된다. 그들을 '심토머(symptomer)라 부른단다.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이르는 사람들이란다. 심토머라.. 매우 그럴싸하게 포장도 했다. 게다가 토포러'라든가 메모리모자이커, 타임스키퍼 등 제법 전문적으로 보이는 용어들을 늘어놨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 '캐비닛 13호'속엔 바로 이런 심토머들의 데이타들이 정리되어 있다. 각각의 심토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어떨 땐 웃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며 또 슬픔과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엽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은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현대사회에서 점점 소외되어가는 삶을 살아간다. 모든 인간이 물건과 닮아 간다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나 인간에서서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의 이야기들에서는 마치 현대의 단절된 인간관계의 모습에 연민을 가지면서 동시에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것 같았다. 또한 심토머들뿐만 아니라 표준이라 일컬어지는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조차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남녀가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애인과 헤어지고 십년동안 키운 개가 죽는 등 한꺼번에 닥친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백칠십팔일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맥주만 마시고 살았다는 남자와 뚱뚱한 몸에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삶을 살면서 이십오만원이나 되는 특대 초밥을 목구멍에서 넘어올때까지 밀어넣은 여자...그들 또한 스스로 평범하기를 거부하는 심토머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책속에 나오는 심토머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모두 꾸며낸 이야기란다. 하지만 뻥이야기라고 단순히 웃어넘기기엔 껄끄러운 뭔가가 남았다. 그들은 각박해져가는 사회와 단절된 인간관계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도플갱어'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마음 속에 꿈꾸는 기발한 상상같은 것들 말이다. 모든 생물들은 초기 발생 단계에서부터 서서히 진화해 왔는데, 인간도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적응하고 변이해 간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앞으로의 미래에서는 인간도 변종된 돌연변이체가 생기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토포러나 타임스킵 메모리모자이커 같은 이야기였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뛰어넘는다거나 불행한 과거를 새로 재창조한다던가..ㅎㅎ 물론 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일종의 정신병증이겠지만...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입담에 비교적 재밌게 읽었지만 뒷맛의 씁쓸함과 엽기적'이다라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작가의 도입말 처럼 우아하다거나 낭만적인 감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일찌감치 이 책을 읽지 말 것을 권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