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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이경자 지음 / 문이당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학창시절 미술시간을 통해 박수근이란 인물에 대해 처음 알았고, 후에 미술관에서 직접 그의 그림을 본적이 있다. 거친 질감에 갈색톤의 어두운 분위기 그리고 작품 속에는 주로 여인들이 등장한다. 눈코입 없이 매우 단순하게 표현된 단조로움... 내가 예술에 대한 감각이나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아님 화려한 인상주의 화풍에 눈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작품에서 그다지 큰 감동을 못받았다. 그냥 우중충하고 단조롭다 생각했다. 그리고 <빨래터>란 작품이 45억 2천만원이란 사상 초유의 낙찰가로 경매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박수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요철은 바로 숨쉬기이며, 틈으로 숨을 쉬고 숨을 통해 살고 숨은 소통이라는 정신을 표현한 박수근의 마티에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가까운 가장 근원적인 바탕에 자연스럽게 사는 선하고 진실한 인간, 그것이 그의 작품이자 박수근 자신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박수근의 <빨래터>라는 그림이 위작논란을 시작으로 박수근의 아들인 성남이 그 그림의 원작자인 존릭스를 만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과거 살아온 날들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좋지 못하다. 오직 그림밖에 모르고 가난한 살림을 거의 내몰라라하고 어머니를 고생시킨 아버지, 그리고 아들 상남에게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점점 커져갔고,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버지의 그림이었다. 상남의 눈엔 아버지의 작품이 매우 거칠고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당대에 자식조차도 쉽게 인정해주지 못했던 작품을 묵묵히 그려나가셨던 아버지 그의 곁에 그를 이해해주는 단 한사람은 아내 김복순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은 정말 감동스럽다. 아버지의 그림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인은 어머니란다. 하지만 그토록 경멸했던 아버지와 같은 화가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작품을 이끌리듯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의 사랑과 진정의 마음을 느끼게 되고, 생전에 아버지에게 한번도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화풍을 자신도 따라 그려본다. 그리고 아버지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인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과 예술가로서 성공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열정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으로 얼룩졌던 박수근의 생전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진정한 천재는 사후에 빛을 발하는 것일까? 얼핏 스쳐지나가면서 보았던 박수근의 작품들을 이젠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작품 속 여인의 모습과 그의 삶 그리고 그가 가진 선하고 진실한 사랑의 느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묵었던 오랜 갈등과 감정이 그림으로 다시 이해되고 화해되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