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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평점 :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유대인이 떠오르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 책의 제목에서 '죽은 유대인'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홀로코스트를 떠올린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를 제외하면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민족, 탈무드 교육법으로 유명한 민족이라는 것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기나긴 전쟁과 폭력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으로 만난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모든 페이지가 충격이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죽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집착이 겉으로는 가장 상냥하고 시민 정신이 투철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는 수많은 방식을 풀어내고, 기록하고, 묘사하고, 똑똑히 말할 것이다. -24쪽
이 책은 유대인이 받은 피해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유대인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박해받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유대인이 차별받은 이유는 그냥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약자에 대한 차별이 그렇듯이 말이다. 유대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옹호하는 방식으로도 차별하는 세상의 기만을 깨닫기 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충격이라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특히 홀로코스트에서 수많은 유대인 예술가를 구해낸 미국인 배리언 프라이의 이야기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가 한나 아렌트나 마르크 샤갈을 구조했다는 사실도, 그런 사람들을 구해냈는데 배리언 프라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도, 구조를 받은 사람이 구조를 해준 사람에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것도, 프라이의 영웅적 행동이 우리 생각만큼 숭고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옳음'이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옳음'이라는 게 사실 '내 마음에 드는 것' 혹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다. 모든 사람은 홀로코스트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홀로코스트에 못 미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홀로코스트는 아니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장벽이 제법 높다. -287쪽
우리는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은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몰라도 그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이유를 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디테일을 자꾸만 알고 싶어하는가. 그 속에 타인의 불행의 이유를 찾아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픈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이 우월감에 비롯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포르노처럼 소비하려는 마음이 단 1%도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의 크기를 저울에 올려놓고 크다 작다 비교하며 재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옳음'을 행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돌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일에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 -276쪽
우리가 유대인에 대해 제대로 안다고 해서 죽은 유대인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배가 가라앉기 전으로,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기 전으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나 하나의 힘으로 세상을 평등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내 안의 차별과 혐오를 깨닫고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쓸모없지는 않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부서진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거기에는 겸손과 공감,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변함없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 변함없는 인식에는 실천과 경계심, 모든 야경의 밤에 깨어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345쪽
프로불편러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차별과 혐오의 현상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괴로움을 견디고 더 많이 공부하고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든 야경의 밤에 깨어 있는 태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아는 것이 힘'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책은 내 마음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또 하나의 도끼가 되어주었고, 이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