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복음
손희영 지음 / 복있는사람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세속화와 복음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과 정리를 써보러 하겠다. 일단 이책의 내용은 세속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와 그로 인한 피해를 막고 복음에 정진하자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세속화란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은 세상사람들의 지식들을 쫓지 마라라는 내용과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 한다. 세속화된 사랑의 태도란 과연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찰할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집착과 중독으로 이야기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면 동의하지만, 너무 사랑이라는 개념을 추상화 어렵게만 만들려고 하지 않았나라고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세속화의 한 기치로서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보았다. 이 비판을 맞을것이다. 분명 우리는 이 다원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기틀 마저도 무너지고 모든게 경계가 무너질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과연 다원주의가 있다고 해서 경계가 무너질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이지 하나님 모시는 일이 아니라고 할수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가질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을 보자.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인종집합소 모든 인간 문화가 모여서 한 틀안에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그 문화를 보면 물론 새로운 문화와 아메리카라는 문화가 있겠지만, 그문화가 섞이지 않고 고유민족 나름의 문화를 지키며 융화되는게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원주의에서 걱정하는것은 우리의 틀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문화가 합해지고 종교가 합해져 통섭이 되는 결과가 생기게 되겠지만, 기본적인 틀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다원주의를 비판함으로서 얻는 것은 우리가 가질수 있는 종교적 틀을 유지하는것이다. 종교적 틀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얻기위해서 버리는 여러가지의 것들이 산재해있다. 특히나 배타성이라는 것인데 우리것이 아니라면 모든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들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손희영 목사님은 연대성이라는 것을 제안했지만, 다원주의인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줄수 있다. 우리는 다원주의를 하지 않고도 상대방과 연대를 할수 있는것인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본다. 우리의 틀을 유지 한다는것 자체가 우리의 것이 남의 것과 구분을 지어서 상대방과 나의 경계를 유지시켜 대화를 막는다는 것인데, 이를 통한 연대성을 만드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듯이 우리는 변해야 하는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하지 않고서 변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것이다. 이를 통한 여러가지 비전과 제시를 보았지만, 그다지 나는 이게 옳다고 보이지 않고 변하기 싫어하는 우리 교단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면 옳은 얘기들로 채워져있지만, 실천하는것이 어려워 보인다. 나의 틀을 상대방에게 맞추는것은 강요가 아닌 사랑으로 할수 있는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것 같다.

 

 사랑에 대한 집착론을 이책에서는 거의 많은 장수로 할애하고 있다. 맞는 말인거 같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이것은 집착이나 중독에 가까운 생활을 우리의 가족이나 생활에 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과연 성경적이냐라고 이야기 할수 있겠다. 과감히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짜 짝퉁 사랑에 대한 집착론이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집착이라는 것으로 치환 되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는 모든 사랑이 집착으로 치환 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 치환이 손희영 목사님의 시선으로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함을 주지 시켜 주고 싶다. 우리는 대개 그렇다하는 것이지 전부가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것도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것이 집착이라는 것으로 모든것이 치환 되버리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고 지적하는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엔 사랑이라는 것도 집착을 하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는것이 사랑이라고 보여진다. 그것이 물론 에로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려고 노력하지만, 전혀 아가페적인 사랑에 대한 정의도 논점도 없는것 같다 이책에선 ,물론 내가 배웠지만, 이 손희영 목사님은 자기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수 있는 것으로 착각 하고 있는것 같다. 많은 선행도 무시할 그런 생각도 하고 그것 마저도 집착과 중독이라는 것으로 치환해버려서 절대적인 아가페를 이야기 하려는것처럼 보이는데 나도 손희영 목사님도 전혀 아가페를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것 같다.

 

 여러가지 지적으로 보아서 손희영 목사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와 다른 기독교를 많은 부분에서 가짜 기독교 세속화된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높음을 주지시켜 주는 듯 하다. 물질주의 여러가지 지적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손희영 목사님이 말하는 바로 그 세속화에 다 빠져있고 손희영 목사님만 아는 바로 옳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 교단에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옳바른 기독교이고 상대방과 역사적으로 퇴보하거나 발전하는 그런 기독교의 모습은 가짜라고 이야기 하고 자신을 따라와야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학교에서도 보았고 여러곳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하는 기독교는 손희영목사님이 말하는 기독교와 일치하는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신의 의지와 뜻을 알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인가라고 묻고 싶다. 물론 세속화된 기독교는 타락하고 나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희영 목사님이 말한 그 기독교가 참기독교라는 것에는 나는 반대하는 편이다. 물론 그런 노력을 폄하하는것이 아니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화석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갈구 하고 살아야 하는것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것에 벗어나는것부터가 먼저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영지주의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고 영과 육의 지식을 분리시켜 많이 알아야 구원을 받는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어보고 싶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것을 많이 알아서 좋은 내용으로 가르쳐야 하지만, 좋지 않는 목회자를 만나 좋지 않는 설교를 듣고 헤매는 사람에게 구원을 물어본다면 어떻게 할것인가라고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버려둬야 한다고 이야기 해야 할것인가? 잘못된 하나님을 만나는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자신이 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난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와 하나님이 온전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이책을 읽고 손희영목사님이 말하는 기독교나 하나님을 알고도 온전한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단지 우리에게 남는것은 끊임없이 노력하여 알려고 하는 노력의 추구만이 있을 뿐이다. 비지식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반지성주의로 흐르는 기독교인들은 전부가 다 손희영 목사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들 나름의 기독교와 하나님을 알고 지내는데 그들에게 나는 너는 가짜야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가 않다. 세속화가 나쁘다고 지적하는걸로 끝나지 않고 나만 따라오면 너네들은 제대로 안다고 하는게 아니라, 같이 탐구하고 그들을 함께 구원시킬 방법을 고안해 내는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지적인 탐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인이나 교육이라고 하나도 없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이야기 해줄것인가? 고민한다. 우리는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보지 못하는 복음이 눈앞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인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완전성을 모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는 옳바른 기독교를 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노력만이 있을뿐이다. 이런분들의 논점대로라면 기독교의 99퍼센트는 지옥에 가는것이다. 잘 알고 있는 교수나 의사들만 가는 게 천국이다. 지적으로 많이 안다고 기독교와 믿음이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 훌륭한 자식이네 하면서 우리를 반겨 줄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같이 못박혀 죽은 강도들은 어떻게 이야기 할텐가? 그들은 예수님을 단한번 만나서 구원에 이르렀다. 죽음앞에서 단한번 고백으로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우리가 헤매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옳바른 고백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틀렸다면 어떻게 할텐가? 단한순간도 우리의 신앙고백은 일정하게 유지된적이 없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과연 신앙고백이 유지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정하게 정해졌다고 해서 역사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바뀌어진 여러 사상들을 이용해서 되어진 신앙과 신학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 바뀌어졌다. 안바뀌고 개인마다 다 다른 사상과 기독교적인 신앙고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게 왜곡되어지고 잘못되어진것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제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것 조차 이해못하실 분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다 아시고 불완전한 것을 다 안다. 일면 옳고 좋은 말씀들로 채워진 책이지만, 자신이 아니면 다 지옥간다는 그런 사상부터가 지나치게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존재가 아닌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시켜 자신을 높게만 보려고 하는 자신은 위대한 사상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구분지으려는 착각을 가지는 사람은 웃기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성경책 글자도 못읽는 분들도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생각을 한다. 반지성주의도 배격하지만 지성주의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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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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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최후의 자서전격으로서 칼융이 죽기전에 회고한 자신의 생애에 대한 책이다. 칼융의 도전적 사상은 나에게 많은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회고록을 처음 읽고 나는 칼융에 대해서 입문을 하였다. 그의 회고록은 나도 저런 삶을 살았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칼융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꼽는 사람이, 세사람이 있는것 같았다. 자서전을 읽을 당시, 니체, 괴테, 프로이트이다. 그의 스승에 대한 어떠한 의견이 있는지 자세히 쓰여 있는 책이 이 책이다. 나도 그의 생각에 동감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설교하는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곤고히 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교주로서의 위치를 다지려고 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자신의 사상이 아니면 무의식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는 프로이트의 제자이자 가장 뛰어난 융과의 결별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한 감정을 융은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긴 했지만 적대적 경쟁자로서의 무의식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나서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것도 나와 매우 비슷하다. 나는 죽었지만, 그는 살았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니체의 사상을 발전 시켜서 받아들이는 그의 노력은 그야말로 대단해 보였다. 이면에서 나는 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가 노력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니체의 종교적인 면이 있다는 것도 염두해 두고 있었다. 이면에서는 프로이트와 니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활용하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니체의 책과 동시에 그것들을 파고드는 작업을 했다. 그의 사상은 이렇게 3명의 사상가들로부터 발전했다.

 그의 유년시절의 꿈과 전쟁 직전의 전쟁을 예견하는 꿈을 묘사하게 되었다. 이 두꿈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로인해서 나는 무의식에 대한 탐구로써 꿈의 분석과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남근의 상징적 모습으로 인한 자신의 꿈에 대한 해석은 놀라우리 만치 통찰력이 뛰어나다. 유년시절의 꿈이 지워 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앞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인 리비도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꿈에 대한 해석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꿈은 영혼과의 만남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만남으로 표현하여 영혼을 상징하는 자신이면의 남성의 여성성과 여자의 남성성을 상징하여 이야기 하며 투사에 대해서 이 책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매우 객관적이고 놀라운 통찰이지만, 향후에 내가 배운 융 심리학에서 꿈분석이 아무래도 타자성을 무시하는 면이 있어서, 꿈의 분석은 뒤로 내버려두고 꿈에 대한 깊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또한 그는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 자신의 직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꿈의 분석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사로서의 직업의 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교수의 지위를 가질수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향해를 하기 위함으로 자신의 모든것을 거는 그런 모습은 나에게는 아주 인상 깊었다. 전쟁을 상징하는 꿈을 꾸면서 그는 자신의 꿈의 예견성을 발견하였고 기록하였다.

 그의 기억이 놀라우리만치 선명하게 내 뇌리에 박힌것은 그만큼 나의 생각과 비슷했기 때문이고 나와 닮아 있기에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 그의 사상과 심리학을 배우게 되면 철학을 배우고 싶은것도 그만큼 철학과 유사한 그의 사유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가이자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이자 의사였다. 그가 겪은 자기에 대한 최종적인 통찰은 그의 모든 사상을 다 뒤엎을 만한 아주 심오한 사상이었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세상의 만다라들과 만나서 그의 사상을 발전 시키는데 사용한다. 융은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의 사상의 깊이를 아는 사람에게는 천재이기에 충분하지만,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저 단순한 사람으로 보여지기에 쉽상이고 또한 또라이로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뜨리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언어는 정제 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힘드나 함묵적이고 철학적이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기억은 유년시절의 모습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쓴다. 이것은 그의 무의식에 대한 노년기의 고백이다. 기억들이 한조각씩 자신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며 완성된 자신의 모습인 이책은 당신에게 철학에게로 신학에게로 심리학에게로 무의식에게로 인도하는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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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 지음, 이신건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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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의 역작 희망의 신학을 읽어보았다. 나와 위르겐몰트만의 만남은 맨처음 신학교에 온 의사가 그를 극찬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부터이다.

몰트만은 애초에 전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로부터 3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른후에 책을 샀고 신학책만 박해하고 철학책만 읽었던 나는 이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위르겐몰트만의 광림교회에서의 설교를 듣고 나서 그가 전하려던 희망이라는게 무엇일까라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던 희망은

어쩌면 가장 힘든 유년시기에서 시작했는지 모른다. 2차세계대전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엄청난 힘든 상황에서 가졌던 희망이라는 단어를 예수로부터

얻었다는 이야기를 부활절 설교에서 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그자신에겐 희망이었고 하나님 나라가 희망이 되어 자신을 바꾸어줄 획기 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그가 당한 고난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예수를 만났고 나도 예수를 만나서 또다른 실날같은 희망을 바라면서 이책을 읽기 시작했다.

  희망의 신학은 읽기 힘든 난해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이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적인 종말론을 폐기하거나 유기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것을 희망으로 바꾸어 육체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로의 기독교인의 전환을 그려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중의 하나가 종말론일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피해갈수 없는 질문이자 숙명이고 우리로서는 피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살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야 했고 우리의 희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부활해야 우리가 앞으로 있을 부활을 할수 있는 것이다. 희망은 반드시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라는것이다. 종말론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그런 노력으로 우리는 종말론을 폐기하거나 없는 일로 치부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또다른 약속이라는 것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약속에 가까이 가서 우리의 삶이 희망으로 가득찬 하나님 나라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의 태고적인 기독교적인 희망이 일어나는 장소인 신과의 인간과의 접촉이 일어나는 공간이 현대에는 교회이지만 그런곳이 아닌 여러 제사를 해야 하는 신과의 만남의 장소를 정했고 그곳은 우리에게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시종일관 그는 종말론을 이야기 하지만 종말론을 접근하기 위해서 말하는 약속과 계시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게 인격적인 만남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해주는 약속인것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말이 되었고 모세의 말이 되었고 예수님의 말이 되었고 사도들의 말이 되어 지금의 기독교가 온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독교는 신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었고 그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시작도 있으니 끝이 있을 거란 이야기와 함께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계시는 앞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희망과 관련되어 있었고, 종말론은 절망이 아닌 새출발일것이고 또다른 희망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대 서사시인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과 과거 미래 현재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의 실존이 거할 현재에 대해서 현존하는 인간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러면서 비추어진 그의 시선은 현재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조명했고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미래를 향한 현재 종말론적으로 향한 현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희망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재 이고 현재라는 것이 미래와 과거에 걸쳐 우리에게 시간으로 현존해 있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희망적인 존재라는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것이고 그것은 부활과 관련되있다는 것이다.

  책리포트는 여기까지고 그는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것이 정말로 좋았다. 칼바르트가 전인구원이라고 이야기 하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뒤집어 엎은 이야기 인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의 조직신학적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종교의 태고적 이야기를 하는것은 상당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이고 약속이라는 것이 신과의 만남의 전부인가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는 신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약속과 계시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보다는 앞으로더 한순간 한순간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시는게 더 좋아 보인다. 우리는 신이 없는 삶을 사는게 아니다. 신은 항상 선하고 하나님께선 우리의 삶을 지배하신다. 심지어 그를 미워하는 존재로 태어난 악인에게도 악인을 사랑해서 구원하려고 노력한다. 아무튼 약속과 계시의 이야기는 좋은면도 있지만, 과연 그런것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이야기 인지 신과의 만남이 그것이 전부인지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신학책은 항상 상대방을 뛰어넘어 자신이 더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남을 다 까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와 허무주의로 변한 현대 철학을 욕했고 칼바르트와 헤겔로 시작하는 변증법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일면 정당하다고 느껴질때도 있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그냥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려고 노력하는 한사람의 노력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이런 사람으로 인해서 한시대를 지배하는 신학을 할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늘어놓는 잡담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로 고정되지 않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시다. 하나의 언어로 묶으려고 하고 자신이 뛰어남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모습은 조직신학자에게 많이 드러난다. 나도 그래서 조직신학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언어 유희 지적 유희로 끝날 이야기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지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는 뛰어 넘어야 할 존재는 많고 그런 존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이야기 하면서 고품격인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아무튼 그의 노력은 성공을 했다고 이야기 할수 있을까? 나는 실패 했다고 본다. 뛰어 넘었다면 현대신학의 지위가 이렇게 추락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현세계를 보면 신학은 철학에 지배를 당하고 한사람에게 지배 당할것이면 존재 하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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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소녀 아키아나 - 그녀의 삶, 그림, 에세이
아키아나 크라마리크 지음, 유정희 옮김 / 크리스천석세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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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아나... 정말 아름답고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여인이다.

그것도 4살에 입신하여 그 경지에 이르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나도 27살에 이르러 성령님의 은혜를 조금 알뿐인데, 이아이는 선택받아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이다.

 

아키아나에 대한 아키아나 부모님께서 하시는 글과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계시를 받아 쓴 시와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놀랍고 경이로웠다.

부럽기도 하지만 그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영문으로 쓴 글과 그녀의 글들을보고 있노라면

아 이아이는 이 재능을 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러웠던 것보다는 당연한 일로 생각이 되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연하고도 맞는 일을 하신다는것을 알게 해주셨다.

 

천국에서 많은 지식을 하나님께 배우고 사실많은 스승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겪은 것처럼 진리의 영이 가르치고 많은 것의 스승이 되어주신다.

여기서 필자도 성령의 은혜로 영화를보든 성경을 보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이것도 은사중의 하나인데, 감사하게도 난 그것을 받았다.

 

지금도 기도중이긴 한데, 아키아나가 가진것에 비해 초라한정도를 달라고 조르는중이다.

사실, 내가 받은 은사도 크다.

 

튀빙겐이나 하버드 갔다 온사람이 평생 성경 연구해서 얻을 지식을 나는 하나님께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키아나는 정말 아름답다. 그림도 아름답고 성격도 좋고 무슨일을 더 할지는 더 기대가 되는 아이이다.

그림만 그리기에는 아까운 재능이다. 더많은 일을 하기 바라고

만나서 한번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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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하나님을 알자
D. A. 카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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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응어리진 생각들을 분출할 기회다. 아무튼 내 블로그니까 싸질러 보는거야

물론 이 주제로 논문이나 책을 써볼 요량은 있다. 이 글을 잘 보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힘써 하나님을 알자. 이책은 참으로 나에게 감사한책이다. 아무래도 내가 가야할 신학적 방향에 대한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는 신학적 지식의 유용성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런 지식에 대한 비판은 칼바르트로도 충분하다 근데 그 칼 바르트도 자기가 성령의 이야기를 한것인지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을 덧씌운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내가 보기엔 자기 생각을 성경에 덧씌운 한명의 신학자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칼바르트도 비판할겸 성경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이야기 하는 웃긴 놈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길가메시 서사시나 벌하우젠의  JEDP문서설이나 두자료설이나 성서학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일단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이야기 해보자, 그것이 성경에 영향을 준건 사실이겠지만, 사실 그 당시 시대는 양식비평을 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그대로 썻다기 보다는 하나의 전해내려 오는 설화 양식이지 이것을 그대로 베껴 썻다는것은 무리가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옆에 놓고 창세기를 썻다고 이야기를 하는 성경학자가 있고 혹은그것에 영향을 받아서 성경이

하나의 신화쯤으로 이야기 하는 놈들이 있는데 웃긴 짓거리이다. 사실 고증하는것도 어차피 하나의 가정이나 설화이고

가설인것을 왜 인정 못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또한 벌하우젠의 JEDP문서설 이 문제도 그렇다. 모세오경이 다른 사람이 썻다는 것의 증거는 사실 문서적 증거 말고는 거의 없다.

이것을 통해 얻을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모세가 쓰지 않고 이책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썻다는증거를 원서적으로 문헌 비평을 했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은 성경을 그리 믿을 만한 책이 아니야 내지는 성경은 신화야 이 율법은 완전하지 못해

우리가 얻을수 있는 지식은 이걸로 됬어. 창세기에 있는 창조론은 허무맹랑한거야

웃기는 짓거리다. 여호와 문서 야훼 문서 그 증거를 발견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입장을 취하고 성경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만 줄 뿐이다.

이면에서 난 회의를 느낀다. 과연 우리가 이 증거를 통해서 얻어야 할 회의의 결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얻는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시는게 무엇인지를 모르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사실 나도 신명기를 읽어보면 이게 모세 혼자 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모세가 썻다고 믿고 싶다.

 

근데 이 모든 문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두자료설에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또한 여기에서 중요한것은 복음서에서 두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불충분하며

 우리는 Q자료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며 마가복음과 두자료가 존재해서 우리가 원복음에 접근할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곧 허사가 될게 분명하고 우리는 가장 웃기는  상황에 처한다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음에 봉착하게 되는것이다.

 

나도 신나게 성경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으면서 아 이게 원복음이지 하면서 자위할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이게 원복음이라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그 시대에 가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게원복음이라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다.

 

아무튼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성경을 읽을때 방해되는 헛소리 내지 잡소리만 늘어놓는게 바로 현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알아도 그만이고 알아봤자. 헛소리만 하는 이상한 신학들이 바로 지금이고 , 나중에 후대에서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하늘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전부 가장 비참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할수 있는 시대가 바로 이시대라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신학을 하는것인지 신에 대해서 이건 신화야 거짓이야 설화야 하고 주장하는 학문을 하는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바울이 썻냐 안썻냐 거짓이 아니냐 이건 원복음이냐 가짜냐 이건 성령이 감동안했다. 저건 진짜고 가짜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영감의 잣대는 우리이성이고 우리인간의 몫인것이다.

웃긴짓거리다

한마디로 월권행위이다. 신이 있어야 할자리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를 판단하는 자격을 부여한것이다.

 

우리는 진짜 신학을 하고 있는가? 바울이 전하려던 복음이 무엇이고 예수님께서 전하려던 복음이 이시대에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을까?

공허한 헛소리나 지껄이면서 우리가 진짜 복음이야 우리가 가짜 복음을 판별해줄게 하는게 아닌가?

그게 신학인지 본질적으로 의문이 든다. 조직신학 하는 사람들 조차 아예 입에 담기 힘들정도로 비판하고싶다. 그들은 또 어떠한가

자기 신학이라고 이야기 하질 않고 허무맹랑한 철학을 이야기 하면서 이게 진짜라고 이야기 하는 그런 사조를 보면 웃기지도 않는다.

 

아무튼 이런 모든 논쟁을 하려면 난 좀 배워야하겠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이책을 읽으면서

이책은 시종일관 신학을 하고 있는 아주 귀중한책이다. 신앙에 대한 학문이고 신에 대한 학문이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배워야 하는게 기독교이다.

 

이책은 그것에 대해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아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한마디로 복음주의는 신학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소리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 신학은 아주 귀중한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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